무오법정사 항일항쟁주역 방동화 스님 일대기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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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오법정사 항일항쟁주역 방동화 스님 일대기 <5>
  • /제주불교
  • 승인 2014.11.20 2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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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년 2월 제주의병항쟁 일어나




[그림1] 인생의 기로



방동화 스님이 한문사숙에서 공부를 마치던 그해 1907년에는 나라에도 커다란 변고가 있었다.

1907년 6월15일 네덜란드의 수도 헤이그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가 열렸다. 고종은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3인의 밀사를 파견했다. 이상설, 이준, 이위종 세 사람은 한국의 ‘독립호소문’을 각국에 배포하고 ‘한국의 호소’라는 연설을 국제기자클럽에서 가졌으나 일본 측의 방해로 성과를 거두지 못 했고 그 와중에 홧병을 앓던 이준이 헤이그에서 7월14일 숨을 거두었다.

밀사사건이 터지자 일본은 한일 양국 정부에서 궐석재판을 열어 종신 징역을 선고하고 지명 체포령을 내렸다. 그리고 통감 이토 히로부리는 이완용 송병준 등의 친일대신을 압박하여 고종의 퇴위를 종용했다. 친일대신 두 사람은 임금을 협박하여 양위조칙을 받아냈다.

고종의 양위소식이 알려지자 한성의 시국이 물끓듯이 요동쳤다. 수천 명의 조선 사람이 덕수궁의 정문인 대한문으로 몰려와 큰 소리로 절규하고 통곡하며 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킨 왜놈들과 친일 매국노 이완용 송병준을 처단하라는 시위를 벌였다.

일본은 고종을 퇴위시키고 7월14일엔 <정미7조약>을 체결하였다. 정미7조약은 군대해산 사법권 위임 각부 차관의 일본인 임용 경찰권 위임 등이 주된 골자였다. 이로써 실질적인 조선의 내정이 모두 일본측에 넘어간 것이다.

군대해산 조칙이 내려지자 대대장 박성환 육군 참령과 부위 구의선이 자결했다. 대대장이 자결하자 병사들은 무기고를 깨뜨려 무장한 후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사전에 치밀하게 준비해 대기하고 있던 일본군의 우수한 화기를 당해내지 못하고 한국군 200여 명, 일본군 100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전투가 끝났다. 군대해산으로 전국 각지의 한국군이 의병을 일으켰고, 여기에 지방민이 합세하여 전국은 의병봉기로 시국이 가마솥 끓듯 하였다.



고종 양위와 군대해산으로 정미의병이 일어나 조선팔도에 총성이 그칠날이 없었다. 육지의 정세가 이처럼 어지럽자 제주경찰서에서는 1907년 서귀포순사주재소를 증설했다.



방동화 스님은 헤이그 밀사사건과 고종의 양위, 군대 해산과 의병봉기에 관한 소식을 들었다. 그는 끓어오르는 의분을 달랠길이 없었다.

방동화 스님은 망국으로 치닫고 있는 혼란한 사회를 개탄하면서 자신의 진로에 대해 깊은 고민에 빠졌다.

스님이 어지러운 세태에 앞으로의 삶에 관해 번민하고 있을 때, 그이 모친 송씨가 1909년 3월 별세하였다.

시름시름 앓던 노모의 운명이 가까워졌을 때 가족들이 유언이 있으면 말하라고 하자 송씨는 가느다란 힘겨운 목소리로 말했다.

“스물 세 살이나 머근 쟤가 장가 가는 걸 봐야 하는디.”

노모는 스물 세 살 된 아들이 결혼하지 못한 걸 걱정했다.

방동화 스님은 노모의 장례 후 더욱 골똘하게 자신의 길에 대해서 깊이 생각했다. 그리고 마침내 불문에 들어가 불교를 공부하기로 작정하였다.



당시 제주도에는 사찰 형식을 갖춘 절이 없이 인법당 수준으로 신앙활동을 하고 있었다. 제주도 사람은 승려가 되려면 육지부의 사찰을 찾아가 출가하였다. 방동화 스님은 1892년 강창규 스님이, 1894년에는 김석윤 스님이 전라북도 위봉사에서 출가하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안봉려관 스님이 1907년 대흥사에서 출가하여 1908년 제주도에 들어와 해월굴에서 기도하면서 절을 짓기 위해 고심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이에 방동화 스님은 불교를 공부하고자 제주 관음사로 갔다. 그곳엔 봉려관 스님이 아직 관음사를 짓기 전이었다.

봉려관 스님은 1865년 6월 14일 제주도 화북리 안 씨 집안에서 출생하여 1900년경 불교에 귀의하였다. 1907년 전남 대흥사의 유장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봉려관 스님은 1908년 봄 제주도로 돌아와 불사를 계획, 관음사를 창건하기까지는 많은 사연이 있었다.



1909년 3월 하순 노모의 장례를 치룬 방동화 스님은 곧 제주 관음사에 가서 강창규 김석윤 스님과 함께 봉려관 스님이 주도한 관음사 창건에 협력했다. 이 때의 인연으로 김석윤 스님과 강창규 스님의 스승이었던 박만하 스님은 훗날 방동화 스님의 스승이 되었다.



이 무렵 주목을 끄는 인물이 상운 김석윤 스님이다.

방동화 스님에게 많은 영향을 미친 김석윤 스님은 관음사 창건에 관여하고 이어서 1909년 관음사 서무에 취임했다. 그리고 1909년 제주의병항쟁에 참모장이라는 핵심 멤버로 활동했다.

김석윤 스님은 1908년 호남 장성에서 거의한 의병장 기우만과 긴밀히 연락하면서 의병항쟁에 참여했다. 의병장에 고시훈 이중심 두 사람을 추대하고 김석윤 스님은 참모장 소임을 맡았다. 김석윤 스님은 고사훈 등과 함께 창의하여 제주 광양에 대장간을 차려 무기를 제조하고, 황사평에서 비밀리에 의병훈련을 추진하였으며 전답을 팔아 재정을 마련하였다. 격문과 교정 조목 집필에 관여하고 구체적 행동을 담은 통고사를 작성하였다.

제주도 의병의 원인은 강압적인 고종퇴위, 한국군 해산에 있었다. 근인으로는 1908년 제주경찰서장에 통감부의 경부 시미츠를 임명하여 다수의 일본 경찰을 인솔하고 부임하였다. 시미츠는 대정 정의 서귀포 등지에 순사주재소를 설치하여 도민을 위협하였다.

한편 1908년 사임하고 떠난 유원구 제주군수는 “일본이 통신과 재정을 장악하고 이 나라의 치안권과 재판권까지 박탈했으니 어찌 이 나라가 존립할 수 있겠는가!”라고 개탄하면서 제주도를 떠났다.

도내 곳곳에 설치된 순사주재소와 제주군수 유원구의 멸망해가는 나라의 장래를 우려한 개탄의 소리는 뜻 있는 제주도 사람들의 의분을 자극하였다. 이에 제주성 동광양 쪽에 살던 유생 고사훈 이석공 과 김석윤 스님은 조인관 노상옥 등과 의논하여 의병봉기를 도모하였다.

고사훈은 서당 숙장 김석익과 고성모를 의병장으로 추대하려 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1909년 2월25일 조인관의 집에서 고사훈 이중심 김석윤 노상옥 김재돌 양남석 한영근 김만석 등이 모여 기병할 것을 결의하였다.

기병 거사일을 그해 3월3일로 정하고 봉기 즉시 제주성을 점령하기도 하였다. 기병 격문과 통고문을 김석윤 스님이 작성하였다. 이들은 격문과 통고문을 2월25일 정오를 기해 사발통문으로 돌리고 병력 동원차 고사훈이 대정군으로 출발했다.

고사훈 조인관 김만석 김재돌 양남석 등은 영락리에 이르러 의병 20여 명을 가담시키고 신평 안성 광청리 등지에서 장정 3백여 명을 가담시켰다. 이 때 대정군수 김종하는 관군 장정 30여명을 동원하여 경찰과 공조해 의병활동을 저지하였다. 의병들은 무장한 경찰과 맞설 수 없어 주춤하였다.

2월28일, 의병장 고사훈과 김만석이 체포하고 나머지 의병은 지휘부를 잃어 흩어졌다. 순사 강원호가 조인관을 체포하려 했으나 그는 순사를 뿌리치고 도주하였다.

3월3일, 고승천과 김만석이 총살되고, 의병 참모장 김석윤이 동광양에서 체포되었다. 이중심, 조인관, 노상욱 등은 귀덕 포구에서 배를 타고 육지로 탈출하는데 성공했다.

일경에 체포된 김석윤은 1909년 4월2일 광주지방재판소에서 유배 10년이란 유형이 선고되자, 항소하였다. 김석윤은 1909년 7월22일 대구공소원에서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가 선고되었다. 하지만 그는 형이 확정될 때까지 옥고를 치렀다.

항소심에서 무죄가 확정되자 김석윤은 제주도로 돌아와 봉려관이 색수수에 관음사를 창건할 때 불교에 대하여 설법하며 많은 재물을 괘척하였다. 김석윤이 관음사에 관여할 때 방동화도 함께 참여하여 힘을 보탰다.

김석윤 스님이 관음사에 주석하여 불사에 협력하고 포교에 주력하고 있을 때 1910년 한일합병이 되었다. 합병 후 일제는 의병항쟁 경력이 있는 김석윤 스님에 대한 감사와 박해를 가하였다.



방동화 스님은 관음사에서 거사로 지내면서 불사에 협력하여, 김석윤 스님이 항소심에서 무죄를 선고 받은 후 함께 관음사에 주석하면서 그로부터 의병봉기에 얽힌 자세한 사정을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전북 임실군 죽림사에서 1892년 출가한 강창규 스님도 관음사ㅣ 창건시 그곳의 불사를 도우면서 함께 살았다.

방동화 스님은 선배이자 육지에서 출가한 강창규와 김석윤, 두 스님으로부터 불자로서 많은 감명을 받았다.



1910년 8월, 마침내 나라는 일본에 병합되고 말았다.

합방되던 그해 연말, 방동화는 한 살 적은 평산 신씨 신태평과 혼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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