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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군 비행학교 설립한 백미대왕 김종림 ..

은영마마 0 2,303 2017.01.10 14:34

 

비행학교 설립한 백미대왕 김종림 .. 1920년 대홍수로 몰락 .. 평생 재기 꿈꾸며 소작농 .. 

백미대왕이라고 불리었던 김종림씨는 잉글우드 공원묘지에 묻혀 있다.

백미대왕이라고 불리었던 김종림씨는 잉글우드 공원묘지에 묻혀 있다. '종림 김:남편-아버지 1884-1973' 이라고 새겨져 있는 묘비석.

미주 한인 군사훈련의 가장 중요한 의의라면 상해임시정부와도 직접 관계가 있는 최초의 공군 창립이다. 이러한 공군 창립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북가주 콜루사와 글렌 카운티에서 쌀농사를 하던 김종림의 추진력으로 가능할 수 있었다.

반아시안 감정이 최고였던 시기에 쌀농사로 한인 중 가장 큰 부자가 된 김종림은 백미대왕이라 불렸다. 그는 백인 파트너와 합작회사를 설립하여 성공했다. 당시 아시안 혼자서는 토지 소유 또는 임대를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이룬 경제적 성공을 바탕으로 막강한 군사력을 키워 조국의 독립을 도모하려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미주 한인들은 공군을 양성해서 독립을 쟁취하겠다는 꿈을 품고 비행대를 조직했고 상해임시정부의 재가를 얻 어 비행학교를 세웠다. 이 비행학교를 설립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바로 김종림이다.

1919년과 1920년은 하와이 멕시코 미국 본토에서 노예 노동자로 착취당하고 있던 미주 한인들이 조국의 통일을 위해 그들의 열정을 불태우던 시기였다. 1919년 3.1운동의 독립 염원이 일본의 총칼에 무너지자 미주 한인들은 더욱 열심히 독립운동에 전념하게 된다. 특히 독립 기금 모금 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으며 독립군 양성을 위한 군사훈련도 시작됐다.

1919년 3월부터 1920년 12월까지 7000명의 한인들이 독립 기금 모금 운동에 참여했다. 이렇게 모금된 기금 중 약 20만 달러의 정부 국채도 가능했다.

서울대 초대 총장이었고 주미 대사를 역임한 장리욱 박사는 '잊지 못할 세대'는 글에서 미주 한인들이 독립운동 기금 모금에 동참하며 희생했다고 밝히고 있다. 그중 김종림과 쌀농사 한인들이 거액의 애국 독립 기금을 기부했다고 쓰고 있다. 이 기금은 상해임시정부 운영에 쓰였고 이승만 안창호 박용만과 같은 독립운동 지도자들의 운동 자금으로도 활용됐다.

남가주대학교(USC)의 동아시아 도서관장인 켄 클라인 박사는 1989년에 발행된 콜루사 카운티 역사책에서 20세기 초반 캘리포니아에는 '10% 계약' 조항이 있었는데 땅 소유주가 90%의 이익을 갖고 소작농은 10%를 받는 계약이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악조건 속에서도 김종림은 열심히 일해 백만장자가 된 것이었다.

캘리포니아 대학교 데이비스 캠퍼스의 역사학과 교수 리처드 김은 김종림이 한 달에 약 3000달러를 2년 동안 꼬박꼬박 기부했다고 밝혔다. 또한 김종림은 비행학교 설립을 위해 비행장을 빌리고 비행기를 구입하는 경비 제반을 혼자서 부담했다고 말했다.

"1919년에 김종림은 이미 백만장자였다. 지금 화폐 가치로 환산하면 엄청난 금액이다. 아마도 김종림은 현재 금액으로 백만 달러 이상 기부한 것으로 추산된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미주 한인들은 연령과 세대에 상관없이 미군에 입대했다. 김종림 역시 고령에도 불구하고 1942년에 캘리포니아 예비군으로 입대했다. 김종림의 두 아들 제임스와 돈도 미 해군에 입대했다. 김종림은 성공한 기업인으로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거금을 기부해 비행학교를 설립했다는 좋은 선례를 남겼다. 그러나 오늘날 역사책에서 김종림에 대한 언급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1920년 10월초 김종림의 쌀 농장은 백년 만에 닥친 대홍수로 인해 물에 잠기는 극심한 피해를 입었다.

김종림의 후손을 찾기 위해 백방으로 수소문하다 안창호의 막내아들 랠프를 만났는데 그는 김종림의 아들 돈과 어린시절 친한 친구였다. 랠프와 돈은 로스앤젤레스 한인 타운에서 함께 자랐다. 어느 여름 랠프와 돈은 1920년대 홍수 이후 김종림이 새로 시작한 농장에서 같이 일했다고 한다.

안창호의 막내아들로 태어난 랠프는 한번도 아버지를 만난 적이 없다. 안창호는 1938년에 일본 경찰의 고문으로 인해 서대문 형무소에서 생을 마감했다. 랠프 안은 많은 대학교에서 인기 강사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돈은 로스앤젤레스 청과 도매상에서 오랫동안 일했는데 현재 은퇴해 라스베이거스에서 살고 있다. 어린 시절 돈은 랠프의 아버지인 안창호 선생을 무척 존경했다고 하는데 정작 자신의 아버지인 김종림이 어떤 일을 했는지는 잘 알지 못했다.

돈이 아버지 김종림과 랠프에 대해 인터뷰를 했다.

100년 만의 대홍수로 농장이 침수된 후 우리 가족은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해 왔다. 우리 형제들은 모두 윌로스에서 출생했고 나만 혼자 로스앤젤레스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나보다 열다섯 살이 많은 코라 일레인 제임스 그리고 나까지 모두 함께 살았는데 우리는 매우 가난했다. 나는 자정에 일어나서 전철을 타고 로스앤젤레스 서쪽에서 다운타운까지 가서 다시 다른 전철로 갈아 타 샌페드로와 9가에 간 후 또다시 버스를 타고 터미널에서 내려 네 시간 동안 트럭에 짐을 싣는 일을 했다. 일을 마친 후 또다시 온 길을 되돌아가야 했는데 그때 내 나이가 열네 살이었다.

그때는 모두 일을 해야 했다. 어머니는 봉제 공장에서 일했고 다른 일도 닥치는 대로 하면서 고된 삶을 살았다. 아버지는 임페리얼밸리의 농장에서 채소 농사를 짓는 소작농으로 일했기 때문에 집에서 떨어진 곳에서 우리와 따로 지냈다. 아마 어느 누구도 아버지처럼 그렇게 열심히 일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버지는 땅을 일구고 씨를 뿌리고 물을 대고 싹이 자라 채소가 되면 수확해서 트럭에 실어 팔았다.

아버지는 1920년 대홍수로 모든 것을 잃어버린 후 사업을 재건하기 위해 엄청나게 노력했다. 열심히 일해서 모은 돈으로 조그만 가게를 운영했고 간장 공장과 또 다른 사업도 시작했지만 끝내 성공하지 못했다. 결국 아버지는 남은 여생을 소작농으로 살아야 했다. 집에 돈을 부치고 나면 남은 것이 거의 없 는 정말 가난한 소작농 말이다.

아버지는 평생을 걸쳐 항상 농사일을 했고 나는 결혼 후 아쉽게도 아버지를 거의 뵙지 못했다. 아버지는 로스앤젤레스로 내려오지 않았다. 도시 생활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89세까지 일을 했고 91세에 돌아가셨다. 어머니가 63세로 돌아가셨을 때 공교롭게도 나의 건강이 매우 좋지 않았다. 나는 어머니와 매우 가까웠기 때문에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많이 힘들었다. 그런데 아버지는 어머니의 장례식에 오지도 않았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도 아버지에게선 연락이 없었다. 아버지는 그런 분이었다.

아버지가 양로원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갔다. 아버지를 보면서 이야기를 했으나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곳을 떠난 후 나는 다시 찾아가지 않았다.

이것만은 기억해달라. 아버지를 좋아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사랑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거의 집에 없었고 가까워질 기회가 전혀 없었다. 어머니와 내가 함께 지내면서 가까웠던 것과 정반대다.

아버지의 장례식에는 많은 사람들이 참석했다. 아주 오래전 일이다. 아버지는 1973년에 잉글우드 공원묘지에 안장되었고 아버지의 묘에는 비석이 세워졌다. 이승만 대통령을 추종했던 아버지는 동지회의 회원이었다. 아버지가 어린 나를 동지회 모임에 데리고 갔던 기억이 난다. 모임 장소에는 노총각이 살고 있었다. 그는 내게 "너희 아버지는 비행학교를 창설하고 운영한 위대한 애국자란다"라고 말했다. 내가 태어나기 이전 아버지는 이런 일을 했던 분이었다. 나는 그러한 역사를 알지 못했다. 나는 고작 여덟살 혹은 열살이었기 때 문에 아버지의 과거와 역사에 대해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어머니도 나에게 아버지의 그러한 역사를 알려주지 않았다.

랠프의 아버지 안창호 선생은 우리의 영웅이었다. 장남인 필립은 유명한 영화배우였는데 우리에게 매우 잘해주었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나의 형 제임스는 18세에 미 해군에 입대했고 형이 입대한 지 3년 후 나도 해군에 입대했다. 랠프와 하워드도 해군에 같이 입대했다. 제임스는 알류샨 군도 전쟁에서 싸웠고 내가 탄 배는 필리핀에 정착했다가 일본의 항복 후 일본에 입성했다. 미 해군은 제임스를 캘텍에 입학시켜 B-12 프로그램의 전기공학을 전공시켰다. 제임스는 벡텔에서 30년간 근무하고 은퇴했는데 몇 년 전 이 세상을 떠났다. 나의 누나 코라 김은 결혼했다가 지금은 양로원에 있다. 일레인은 어릴 때 병원에서 숨졌다. 나는 두 명의 혼혈 딸들을 입양했으며 이제 그 아이들 모두 커서 결혼했다. 나는 평생을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청과 도매상에서 일하다 은퇴 후 라스베이거스로 이주했고 로스앤젤레스에는 다시 가본 적이 없다.

 

http://www.koreadaily.com/news/read.asp?art_id=4814056

 

 

1920, 대한민국 하늘을 열다 - 독립운동 지도자들 - 김종림

대한민국임시정부 비행학교/비행대의 창설과 발전에 있어서 정부의 리더십을 대표한 인물이 노백린이었다면 민간의 리더십을 대표한 인물이 김종림이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비행학교/비행대의 창설과 발전에 있어서 정부의 리더십을 대표한 인물이 노백린이었다면 민간의 리더십을 대표한 인물이 김종림이었다.
공군력을 앞세운 독립전쟁을 위해 비행학교 설립을 결심했으나 군자금 문제로 고민하던 노백린은 한 인물을 만나게 된다. 김종림(1884-1973)이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비행학교/비행대 창설을 가능하게 했던 인적 물적 자원은 재미동포들의 애국심과 경제력에서 나왔다. 특히, 재정적 지원을 도맡다시피 함으로써 현실적으로 비행학교/비행대 탄생을 가능하게 했던 인물이 김종림이었다.

송복 전 연세대 교수는 유성룡과 이순신의 만남이 임진왜란으로부터 나라를 구했다는 점에서 이 두 영웅의 만남을 '위대한 만남'이라 일컬었다. 독립전쟁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있은 노백린과 김종림의 만남 역시 또 다른 '위대한 만남'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김종림은 독립운동가이자 신문인이자 사회봉사자인 재미한인 백만장자였다. 임시정부 비행학교/비행대의 창설과 발전에 있어서 정부의 리더십을 대표한 인물이 노백린이었다면 민간의 리더십을 대표한 인물이 김종림이었다.

김종림은 젊은 나이에 빈손으로 미국으로 와 조국도 없는 가난한 이민자로서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난세를 타고 불과 10여년 만에 막대한 부를 축적한 풍운아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임시정부의 비행학교/비행대 창설이라는 야심찬 계획의 실현을 가능하게 했던 장본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업적에 대해서는 평생 철저히 침묵으로 일관, 그의 둘째 아들 김두원도 생전 인터뷰에서 "아버지의 사후에도 오랫동안 우리 형제들조차 아버지의 업적에 대해 전혀 몰랐다."고 안타까워했던 인물이다.

김종림은 함경남도 완평군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김도식이 교사였으니 당시 조선의 지식층이었으나, 김종림의 흥사단이력서에는 학력 부문 자체가 없으며 직업 부문은 19세가 되던 1905년 한 해 동안 고향에서 쌀농사를 지었다고 시작하는 것으로 봐서 고등교육은 받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김종림은 일제의 그림자가 짙어가는 조선에서 농부로 사는 것에 회의를 느낀 듯 1906년 하와이로 와서 사탕농사와 벼농사에 손을 댔다.(김종림의 흥사단 이력서, 1913년 10월 17일. 김종림은 흥사단 34단우) 그는 이듬해 정월 '앨러미다'(Alameda) 선편으로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해 솔트레이크시티로 갔는데 이번에는 철도 노동자 신분이었다.

이후 각종 기록으로 확인되는 기간만 약 40년에 걸치는 김종림의 조국사랑과 기부와 봉사는 그가 자신의 삶조차 지탱하기 어렵던 철도노동자 시절부터 시작된다.

그는 그해 공립협회에 의연금 10달러를 기부한데 이어 이듬해 정월에는 공립신보의 신문기계 구입을 위해 30달러를 기부하는데 가난한 철도노동자로서는 거금이었다. 공립협회는 안창호가 1905년 캘리포니아주 리버사이드에서 창립해 후에 국민회로 통합된 민족운동단체이고, 공립신보는 이 단체의 기관지로서 후에 신한민보로 개명됐다.

김종림은 철도노동자의 삶을 청산하고 1908년 캘리포니아로 돌아와(공립신보, 1908년 6월 3일), 아세아실업주식회사 설립을 주도하는 것을 시작으로 독립운동가이자 사업가로서 면모를 서서히 드러내기 시작한다(공립신보, 1908년 10월 21일). 아세아실업주식회사는 주식태동실업회사의 전신으로 대한인국민회가 사업을 주관해 만주와 연해주에 독립군 근거지 육성을 목적으로 했던 사업체였다.(신한민보, 1909년 4월 28일)

이때까지만 해도 성공한 사업가는 아니었던 김종림은 독립운동을 위해 적으나마 돈이 있으면 돈을 내고 돈이 없으면 식품이나 자신의 시간을 내놓았으며, 이승만, 이상설 등과 함께 조선 내 고아를 돕는 구휼기관으로 평안북도 선천에 세운 대동고아원 건립을 주도하기도 했다.(공립신보, 1908년 7월 22, 11년 18일)

그는 언론을 통한 독립운동에도 깊은 관심을 보여 공립신보 사무원으로 노력 봉사도 하고 공립신보와 신한민보의 인쇄인을 맡기도 했고 후에는 국민보를 위해서도 헌신했다

 

http://www.koreadaily.com/news/read.asp?art_id=24584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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