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엘리의 도시는 말한다]㊸하노이–글로벌 제조기지, 산업 브랜드의 교과서

현대의 도시는 단순한 생활공간이 아닌 경제 전략의 최전선이다. 세계 각국은 도시 브랜드를 기반으로 투자 유치, 글로벌 인재 확보, 스타트업 생태계 형성 경쟁을 펼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름’은 곧 ‘전략’이며, 도시 간 경쟁력의 상징적 신호로 기능한다. 본 연재는 글로벌 도시의 지명 유래를 통해 경제, 역사, 문화, 외교의 맥락을 통합적으로 조명하고, 독자에게 도시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고자 한다. [편집자주]
강 안쪽의 수도, 산업을 설계하는 도시가 되다
하노이의 첫인상은 의외로 고요하다. 고층 빌딩보다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홍강(紅河)을 따라 형성된 평야와 오래된 가로수, 그리고 호수 주변을 천천히 흐르는 생활의 속도다.
‘하노이(Hà Nội)’라는 이름이 ‘강 안쪽의 도시’라는 뜻을 갖게 된 이유는 이러한 지리적 구조에서 출발한다. 강이 감싸 안은 땅, 외부의 침입을 방어하면서도 교역과 행정을 동시에 수행할 수 있었던 입지. 수도가 자리 잡기에는 더없이 적합한 조건이다.
천년 전 탕롱(昇龍, 떠오르는 용)으로 불리며 왕조의 수도가 된 후, 이 도시는 권력과 질서의 중심으로 기능해왔다. 프랑스 식민 시기에는 인도차이나 행정의 심장부로 재편됐고, 사회주의 체제 아래서는 계획경제를 지휘하는 정치 수도 역할을 했다. 당시의 하노이는 시장과 기업의 도시라기보다, 통제와 배급, 국가 운영의 본부에 가까웠다.
전환점은 도이머이(Đổi Mới : 쇄신을 뜻하는 베트남 어)였다. 개방은 단순한 경제정책이 아니라 수도의 기능을 재설계하는 사건이었다. 외국인 투자 유치, 산업단지 승인, 통관·세제·노동 정책이 중앙정부를 통해 조율되면서 하노이는 자연스럽게 ‘기업이 베트남을 만나는 첫 창구’가 되었다.
그래서 하노이를 걷다 보면 흥미로운 이중성이 느껴진다. 표면적으로는 호수와 구시가지, 식민 건축이 어우러진 역사 도시로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층위에서는 글로벌 자본과 국가 산업전략 간 치열한 협상의 장이 열리는 도시이기도 하다. 행정수도라는 명칭은 그대로지만, 실제 기능은 ‘산업을 설계하는 수도’로 확장되어 있다.
수도 브랜드를 완성한 세 개의 축…빈그룹·비엣텔·선하우스
하노이의 도시 브랜드를 이해하려면 글로벌 기업보다 먼저 로컬 앵커기업을 봐야 한다. 수도의 이미지는 외국 자본만으로 완성되지 않기 때문이다.
가장 상징적인 존재는 빈그룹(Vingroup)이다. 롱비엔을 중심으로 본사와 핵심 거점을 둔 이 기업은 부동산, 리테일, 의료, 교육, 전기차 등 다양한 산업 분야로 영역을 확장한 베트남 최대 민간 복합기업이다. 빈홈즈 주거단지, 빈콤 리테일 상업시설, 병원과 학교가 결합된 생활권 개발 모델은 하노이의 중산층 라이프스타일을 물리적으로 구현했다. 도시의 스카이라인과 소비문화, 주거 기준이 한 기업의 전략을 통해 재편되면서 수도의 생활 인프라 브랜드가 형성됐다.
비엣텔(Viettel)은 또 다른 차원의 이미지를 만든다. 군 통신에서 출발한 국영 ICT 그룹 비엣텔은 모바일·인터넷을 넘어 디지털 금융, 클라우드, 사이버보안으로 사업 분야를 확장했고, Viettel Global을 통해 해외 통신 인프라 시장까지 진출했다. 하노이에 본사를 둔 이 기업의 글로벌 행보는 베트남이 단순 제조국을 넘어 네트워크와 디지털 인프라를 수출하는 국가라는 인식을 강화시킨다. 수도가 기술주권 전략의 설계지로 기능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례다.
여기에 선하우스(Sunhouse)가 더해지면 산업 구조의 균형이 완성된다. 하노이 기반 생활·주방가전 제조기업인 선하우스는 북미, 일본, 한국 등 20개국 이상으로 제품을 수출하며 로컬 제조 브랜드의 글로벌 확장 가능성을 입증했다. 대기업·국영기업·중견 제조기업이 삼각축을 이루며 도시 브랜드를 지탱하는 구조다.
이 조합은 의미심장하다. 생활 인프라, 디지털 네트워크, 제조 수출 등 산업 이미지를 구성하는 핵심 요소가 모두 수도인 하노이 안에서 출발한다. 글로벌 기업이 들어와 도시를 키운 것이 아니라, 로컬 챔피언이 먼저 브랜드의 골격을 만들고 그 위에 글로벌 자본이 결합한 형태다.
수도에서 시작되는 글로벌 생산라인
하노이의 산업적 위상은 도심을 벗어나는 순간 더 또렷해진다. 차량으로 한 시간 남짓 이동하면 박닌, 타이응우옌, 하이퐁, 빈푹으로 이어지는 북부 산업벨트가 펼쳐진다. 삼성, LG, 캐논, 폭스콘, 파나소닉, 인텔 등 글로벌 생산거점이 밀집한 이 권역은 베트남 제조 경쟁력의 핵심 축이다.
흥미로운 점은 기능적 분업이다. 정책 협상과 행정 설계는 수도에서, 실제 생산은 위성 산업도시에서 이루어진다. 글로벌 기업 입장에서는 행정 효율성과 생산 효율성을 동시에 확보할 수 있는 구조다. 하노이는 공장 굴뚝의 도시라기보다, 제조 생태계를 설계·조정·지원하는 컨트롤타워에 가깝다.
이 구조 속에서 도시 브랜드도 독특하게 형성된다. 혁신이나 금융처럼 전면에 드러나는 상징 대신, ‘장기투자하기 가장 안정적인 수도’라는 신뢰 자산이 축적된다. 화려함보다 지속성, 속도보다 일관성으로 구축된 산업 브랜드다.
공항으로 향하는 길, 차창 밖으로 산업단지의 불빛이 길게 이어진다. 낮에는 보이지 않던 생산라인의 리듬이 밤이 되어서야 드러난다. 하노이는 화려함으로 기억되는 도시가 아니다. 대신 신뢰로 축적되는 도시다.
어쩌면 그래서일지 모른다. 세계 기업들은 계약서에 사인을 남기고 떠나지만, 생산은 여전히 이 도시에 남겨 둔다. 그리고 그 조용한 잔류물이 하노이라는 도시 브랜드를 조금씩 더 단단하게 만든다.
장엘리 동명대학교 글로벌비즈니스학과 초빙교수 labmoneta618@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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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엘리 교수는 동명대학교 글로벌비즈니스학과 초빙교수이자, 국립외교원/외교부 외래교수, 글로벌 커뮤니케이션 전략 컨설팅사 랩 모네타(Lab MoNETA) 대표 컨설턴트다. 방송 및 언론 분야에서 오랜 경력을 가진 그는 삼표그룹 홍보팀장을 역임했고, 한국경제TV, 내외경제TV, 아리랑TV 등에서 앵커 및 콘텐츠 기획자로 활약했다.
현재는 도시 기반의 경제 커뮤니케이션 전략, 스타트업 국제 진출 컨설팅, 글로벌 IR 피칭 등을 지원하며, 공공기관과 민간기업을 연결하는 실전형 컨설턴트로 활동 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