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 Culture

그놈의 “공상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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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스플래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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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작가가 인터뷰를 하거나 방송에 출연할 때 늘 신경 써야 하는 일이 있다. “공상과학”이라는 표현이 나가지 않게 하는 것이다. 언제부터 시작한 운동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SF 작가가 된 것보다 오래되었음은 분명하다. 나는 원래부터 SF 팬으로 활동하던 사람이 아니어서 이 운동의 창시자가 누구인지까지는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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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큼 오래된 운동이지만 방심은 금물이다. 190번쯤 이야기했으니 이제는 용어가 좀 정리됐겠지 하고 방심하는 순간, 내 사진 아래에 “공상과학(SF) 소설가”라는 말이 떡하니 박히곤 한다. “공상과학”이 맞는 표현이고 일부는 “SF”라고 부르기도 한다는 뜻인데, 나나 다른 SF 작가들이 지향하는 것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의도를 담은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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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상과학”이라는 말은 왜 안 되는 걸까? 일단은 틀린 번역이다. 이 한마디로 설득이 끝난다면 좋겠지만 현실은 다르다. 풀이하자면, SF는 ‘Science Fiction’(과학소설)? 혹은 ‘Speculative Fiction’(사변소설)을 줄인 말이라고 한다. SF계 종사자들이 사용하는 번역어는 과학소설이고, 사변소설은 SF가 반드시 과학에만 얽매이는 문학이 아니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말인데 이 또한 널리 받아들여지는 표현이다. 아무튼 “공상”이라는 말은 들어간 적이 없다.


“공상”은 어디에서 튀어나왔을까? 용의자는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옛날 일본 사람들이, 판타지와 SF를 모두 다루는 『판타지 앤드 사이언스 픽션Fantasy & Science Fiction』이라는 미국 잡지를 번역해내면서 “공상과학소설지”라는 한자로 된 부제를 달았는데, 이것이 한국으로 전해져 공상과학이라는 표현의 기원이 되었다는 설이다. 즉, “판타지” 부분이 “공상”이 된 다음 “과학소설”이라는 말 앞에 붙어버린 것이다. 정설이지만 모든 단계가 엄밀하게 규명된 가설은 아닌데, 아무튼 “공상과학”이라는 표현이 애초에 상표명인 데다 일본에서 만들어진 조어라는 점이 부각되기 때문에 굳이 SF를 “공상과학”으로 교정해주는 분들께는 충분한 설명이 되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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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세상에는 출판 관계자가 아니면서도 “공상과학”이라는 말을 고집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기성세대에 속한 독자들 중에는 어렸을 때 “공상과학”으로 소개된 SF를 읽고 자라서 지금도 “공상과학”이라는 이름을 놓을 수가 없다는 분들도 있다. 문제는 그때 소개된 SF와 지금 한국 창작자들이 새로 쓰고 있는 SF는 경향이 다르고, 심지어 그때 번역된 SF와 지금 번역되는 SF도 달라서 장르 전체의 이름을 추억의 “공상과학”으로 삼기에는 간극이 너무 크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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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맥락에서 막무가내로 “나는 공상과학이 정감 있고 더 좋은데” 하는 분들에게는 “그럼 당신 직업이나 단체 이름 앞에 공상을 붙여보시라”고 답하고 싶은데, 물론 아직 실제로 해본 적은 없다. 공상서점, 공상출판사, 공상편집자, 공상신문사, 공상평론가, 공상기획팀, 공상국어사전, 공상김은경. 이 얼마나 정감 있는 표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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붙여보면 알겠지만 공상은 그다지 중립적인 말이 아니다. ‘상상’이나 ‘환상’에 비해서도 부정적인 표현이고, 작가와 작품을 순식간에 B급으로 떨어뜨리는 용어다. B급 예술로서 SF를 추구하는 창작자나 소비자도 있겠지만, 그 7080 기획의 결과물이 현대 한국 SF보다 나은지는 잘 모르겠다. 이 문장을 쓰는 순간 고개가 저절로 좌우로 움직이는 것을 보면 기억에 남는 결과물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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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열심히 설명을 하다 보니, 가끔은 SF 작가들이 “공상과학”이라는 표현만 보면 부들부들한다는 사람들이 있는데, 적어도 내 경우는 표현 자체가 징그러워 보인다거나 하는 정도는 아니다. 아마 많은 SF 종사자들이 그러리라고 믿는다. 다만 수십 년에 걸쳐 어떤 표현을 다른 표현으로 바꾸려고 노력해온 사람들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평소에 백번쯤 정정하고 다녔는데, 어느 날 내 사진이 걸린 인터뷰 기사에 고치려고 했던 바로 그 표현이 떡하니 나와 있는 모습을 상상해보자. 어떤 기분이 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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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선의로 이 표현을 쓰는 사람들이다. 사람들은 친절하게도 SF라는 표현을 보면 정정을 하곤 한다. 일단 영어이기 때문이다. 가장 최근에 나온 내 장편소설 제목은 『고고심령학자』? 인데, 종종 “고고심리학자”로 소개된 경우를 볼 때가 있다. 둘 다 이상한 말이지만, 고고심령학자보다는 고고심리학자가 그나마 말이 된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어딘가에 박혀 있었던 것이다. SF도 마찬가지다. 별다른 의도 없이 “공상과학”이라는 말을 쓰는 사람들에게 이 표현은 일종의 순화(純化)다. ‘포클레인’을 ‘굴삭기’로 순화하듯 가치판단이 개입되지 않은 기계적인 과정이다. 이들을 나무랄 수는 없고, 설명이 좀 길어지더라도 “공상과학이라는 말은 쓰지 말아주세요” 하고 부탁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다 한 번쯤 빠뜨리기라도 하면 “공상과학(SF) 소설가”라는 타이틀이 달리고 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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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라고 싶은 경우는, 본격적으로 SF를 다뤄볼 계획이라며 연락해온 분이 “공상과학”이라는 표현을 쓸 때처럼 특수한 경우뿐이다. 이런 제의는 거절할 가능성이 높은데, 이것은 그분이 실례를 범해서가 아니라 설명과 달리 SF에 대해 거의 아무런 공부가 안 되어 있는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이다. “공상과학”이라는 표현에 대한 SF계 종사자의 의견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는 이야기이고, “공상과학이라고 하지 마세요” 하고 앵무새처럼 읊어대는 SF 작가들을 만나본 적이 없다는 말이므로, 나로서는 상대가 정말로 SF를 본격적으로 다룰 생각인지 의심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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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가 “공상과학”에 대해 내가 할 수 있는 일반인 이야기다. 한 10년쯤 반복했던 설명이고, 앞으로도 계속해야 할 말이다. 그러면 지금부터는 “공상과학”을 용인할 수밖에 없는 정말로 특별한 경우를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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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6월에 나는 한국문학번역원의 지원으로 모스크바 고등경제대학교 한국학과에 특강을 하러 간 적이 있다. 현지 대학생들이 한 학기 동안 한국 작가의 단편소설을 번역하고, 학기가 끝날 때쯤 해당 작품을 쓴 작가가 직접 현지 대학을 찾아 번역 중인 작품에 대해 질문을 주고받거나 자세한 이야기를 나누는 워크숍이었다. 학기가 시작되기 전, 같은 해 봄에 번역원 담당자로부터 워크숍에 관해 짤막한 설명을 전달받았는데 여기에서 또 그놈의 “공상과학”과 조우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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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해오던 절차에 따라 나는 “공상과학”이라는 표현이 왜 적절하지 않은지를 설명하는 메일을 보냈다. 되도록 짤막하게, 일본 잡지 이름에서 파생된 말이라는 설명 정도를 덧붙였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답이 돌아왔다. “공상과학”이라는 표현은 번역원에서 넣은 말이 아니라 러시아 현지 한국학과에서 지은 행사명에 들어 있는 표현이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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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쯤에서 또 느닷없이 세계로 떠나보자. 러시아에서 SF는 научная фантастика, 즉 과학 판타지다. 올해까지 내가 부대표를 맡고 있는 한국과학소설작가연대에는 러시아 문학을 전공한 정보라 작가가 속해 있는데, 나는 이분을 통해 동유럽과 러시아의 SF가 판타지와 명확히 구분되지 않은 상태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또한 러시아로 떠나기 전에 이 내용을 다시 확인받기도 했다. 2018년에는 중국의 SF계 종사자들과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이 과정에서 중국어로는 SF가 ‘科幻’으로 번역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풀어서 쓰면 ‘과학환상’이 되는 약어다. 냉전 시대의 기억이 희미한 분들에게는 감이 멀지도 모르겠지만, 우리가 알던 세계의 저 건너편, 알아서는 안 되었던 지구의 저편에서 자라난 SF는 ‘사이언스 픽션’이 아니라 정말로 ‘사이언스 판타지’였던 것이다. 따로 연구를 해보지는 않았지만, 명칭만 다른 것이 아니라 개념에 담긴 미학적인 차이도 있으리라고 짐작해본다. 과학과 판타지 사이의 균형, 현실과 비현실을 배합하는 방법의 차이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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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대를 이어 SF 팬인 한국학과 교수가 SF를 한국어로 옮기면, 공상과학이라는 표현이 나오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러시아에서라면 그렇다. 나는 이 글의 앞부분에 나오는 모든 “공상과학”에 따옴표를 씌워 이 표현의 독성을 중화하고 있지만, 한국어를 하는 러시아인들이 쓴 공상과학이라는 말만큼은 따옴표 밖에 나와 있어도 유해해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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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크숍 다음 날에는, 러시아 국립도서관, 혹은 러시아 중앙도서관에서 일반인을 대상으로 강연을 했다. 옛 이름인 레닌 도서관으로 더 유명한 도서관이다. SF 팬인 한국학과 교수님이 통역을 해주셨는데, 러시아어라고는 인사말과 숫자 정도밖에 모르는 내 귀에도 쏙쏙 들어오는 한마디가 있었다. 판타스티카! ‘научная фантастика’의 뒤쪽에 있는 단어다. 듣고 있으면 왠지 환상적인 기분이 드는 말이기도 했다. 같은 뜻이라도 “공상”처럼 부정적인 어감은 아니어서 그럴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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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에서의 모든 일정이 끝나자, 나를 거기까지 가게 한 선생님이 기념품을 주셨다. 번역 수업을 들은 학생들과 나눠 입은 티셔츠였다. 거기에는 옛 소련 스타일로 된 우주 비행사 그림이 프린트되어 있고 그림 바로 아래에는 “2019 한국 공상과학의 부흥”이라는 문구가 찍혀 있었다. 선생님들도, 학생들도 거의 전부 여성인 수업이라 나에게는 맞지 않는 티셔츠였다. 한국으로 돌아온 뒤, 한국과학소설작가연대 대표인 정소연 작가와 정보라 작가에게 한 벌씩을 선물했다. 글귀만 놓고 보면 모두가 내키지 않아 할 선물이었지만 내력을 듣고 나면 덜 해로워 보이는 옷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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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워크숍을 함께한 러시아 분들은 내 설명을 듣고 난 뒤 공상과학이라는 표현을 과학소설로 바꾸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한국인들이 웬만해서는 겪을 일이 없는, 원어민 사용자의 권위 같은 게 발휘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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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다시 “공상과학”이라는 용어로 돌아와 보자. 이 글의 전반부만 읽었을 때와 어딘지 조금 다르게 느껴진다면 이 글을 쓰는 목적은 어느 정도 달성된 것이다. 요약하면 이런 내용이다. 현대 한국 SF는 미국 진영의 영향 아래에서 자라났다. 근대 한국의 많은 것들이 그렇듯 일본을 거쳐 온 흔적이 남아 있으며, 여력이 생기자 외국의 “선진 문물”을 기계적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얻은 엉뚱한 관성을 거부하는 기간을 거쳤고, 자기 정체성을 고민하다가 스스로 과학소설이라는 이름을 택했다. 하지만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과학이라는 말의 무게가 너무 무거웠던 탓이다. 아마 이 이야기는 뒤에 다시 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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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왕 세계 여행을 다녀온 김에 교훈 하나를 덧붙여보자. 똑같은 이야기도 세계 혹은 세상이라는 맥락 가운데에 놓고 생각해보면 의미가 달라질 수 있다. 느닷없이 세계 여행을 다녀온 “공상과학”은 상황에 따라 괄호를 떼도 좋을 만큼 안전한 물건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은 과학소설과 “공상과학”이라는 이름에만 국한된 명제가 아니다. ‘나의 이야기’로 끝나도 좋은 소설의 서사를 굳이 세상이라는 공간 위에 다시 펼쳐놓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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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는 내면의 성찰을 통해서만 획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세계도 마찬가지로 존재와 삶의 의미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이 될 수 있다. 나에게 SF란 그 세계의 크기를 우주 규모까지 확대할 수 있는 마법 같은 도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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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를 쓰려면 역시 국제정치학을 배우는 게 유리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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