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 Culture

천하삼분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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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이것은 삼국지 이야기다. 하지만 알고 보면 또 세계에 관한 이야기다. 천하가 맨 앞에 나오는 소제목이니까.


2019년 6월 모스크바 고등경제대학교 한국학과에서 ?『춤추는 사신(使臣)』 ? 번역 워크숍을 하면서 들었던 많은 질문 중 가장 난감한 것이 바로 천하에 관한 것이었다. ‘천하’와 ‘세계’와 ‘세상’은 어떻게 구별되나요, 러시아어에서는 구분이 안 되는데? 대답은 이렇다. 세계와 세상은 겹치는 부분이 많지만, 세계가 상대적으로 객관적인 부분을 가리킨다면 세상은 그보다 주관적인 영역을 포함한다. “세계에 대해서 알아보자”라고 말할 때와 “세상을 좀더 알아보려고요”라고 할 때의 차이를 생각해보면 좋을 것이다. 앞의 말은 지금부터 공부를 시작하자는 말에 가깝고, 뒤의 말은 모험을 떠나는 상황에 어울린다. 해석을 거친 세계가 세상이고 세상의 객관적인 형태가 세계라고도 할 수 있는데, 앞에서도 말했듯 이 둘은 겹치는 부분이 많다.


천하는 중국과 그 근처에서 살던 사람들이 생각했던 주관적인 세계다. 세상이 다소 막연하게 주관적인 세계라면, 천하는 그보다 훨씬 체계적인 상상이다. 한자로는 하늘 아래〔天下〕라는 뜻이지만 하늘 아래가 전부 천하는 아니다. 지구본 위 경선과 위선으로 둘러싸인 네모를 기준으로 열 칸 남짓, 많아야 열다섯 칸 정도 되는 공간이다. 동양이고 서양이고 인도고, 정복자들이 겨우 열 칸 정도를 차지했을 때 세계를 지배했다고 선언해버리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물론 훨씬 작은 공간을 천하로 인식하는 경우도 많다. 한국 사극에서 “천하를 도모한다”라는 말은 중국까지 점령하겠다는 뜻이 아니다. 언젠가 오키나와를 여행하면서 재미있었던 점은, 이 작은 세계도 아주 오래전에는 세 개의 나라로 나뉘어 있었다는 것이다. ?『춤추는 사신』? 의 작은 천하가 셋으로 나뉘어 있었던 것도 사실은 여기에서 비롯된다. 천하와 세상과 세계는 이런 방식으로 구별할 수 있다. 적어도 내 소설 안에서는 이런 방식으로 나눠서 쓰고 있기 때문에, 나에게 질문한 러시아 학생들에게는 충분한 대답이 되었으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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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제목으로 돌아가서, 천하삼분지계는 제갈량이 면접시험에서 슬럼프에 빠진 군벌 유비에게 했다는 PT의 제목이다. 어떤 그림일지 상상해보자. 제갈량은 경력이 일천하지만 추천서만큼은 기가 막히게 잘 받았다. 그래서 면접관이 직접 집을 찾아오기까지 했는데, 두 번이나 면접관을 바람맞힌 제갈량은 세 번째 면접에서도 지각을 해버린다. 다행히 CEO는 괜찮다고 하지만, 따라온 다른 면접관들은 화가 잔뜩 나 있다.


그리고 문제의 PT가 시작된다. 그 PT를 본 경험 많은 황족 군벌 유비는 제갈량을 전격 채용했을 뿐만 아니라 단번에 임원의 자리에 앉혀놓는다. 밤새도록 제갈량과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말도 있지만 다른 데서도 본 이야기이므로 일단 그것까지는 믿지 않기로 한다.


자, 문제의 PT, 천하삼분지계를 읽어보자. 무슨 내용인가? 별 내용 아니다. 삼국정립(三國鼎立). 여기에 나오는 ‘정’이라는 글자는 박물관에 가면 볼 수 있는 발이 셋 달린 솥이다. 세 개의 나라가 천하를 떠받들게 한다는 의미다. 감동적인가? 당신이 이미 온갖 산전수전을 다 겪고 간신히 목숨을 건진 채 먼 땅으로 피난 온 군벌이라면 이 말을 듣고 운명을 바꿀 결심을 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유비가 대단한 것이다,가 아니고 여기에서 나의 고민이 시작됐다. 일단 삼극체제를 떠올려보자.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하기 위해 세계를 삼극체제로 분할하겠다는 계획은 말이 되는가? 안 된다. 삼극체제는 전쟁이 끊이지 않는 체제다. 우리 삼국시대를 떠올려보면 쉽게 상상이 될 것이다. 한 나라가 강성해지면 나머지 두 나라가 연합해서 대응한다. 어쩌면 나머지 두 나라가 연합해서 고립된 나라를 칠 수도 있지만, 이 순간 고민이 생긴다. 연합한 두 나라의 국력이 같지 않기 때문이다. 둘만 남을 경우 약한 쪽이 불리해지기 마련이므로 한 나라를 치기 위한 두 나라의 연합은 목적이 달성되기 직전에 깨지고 만다. 그리고 제일 강한 한 나라를 견제하기 위한 2위, 3위 국가의 연합이 새롭게 만들어진다.


국제정치학에서는 전략적 삼각관계라는 이름으로 정리되어 있는 이론인데, 꼭 이론으로 정리되어 있지 않더라도 상황이 어떻게 돌아갈지를 예측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1984』? 의 풍경에서도 떠올릴 수 있듯 세 나라는 동맹을 계속 교체해가며 장기간 전쟁을 이어갈 것이다. 즉, 백성들은 계속해서 도탄에 빠져 있는 상태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국제정치학자나 당대의 모사가 아니어도 현실 정치에서 잔뼈가 굵은 정치인이라면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유비가 고작 이 브리핑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감탄했다니, 제갈량이 겨우 이 정도 전략을 믿고 면접관을 두 번이나 헛걸음하게 만들었다니, 믿을 수 있겠는가.


물론 우리가 읽은 것은 소설 아니면 희곡이므로 제갈량의 브리핑을 굳이 재구성해낼 의무는 없다. 하지만 이 부분에 이르면 김이 새버리는 것도 어쩔 수가 없다. 그래서 연구를 시작했다. 제갈량이 무슨 말을 했기에 유비 같은 닳고 닳은 군벌이 간과 쓸개를 내주었을까.


어디에도 근거는 나와 있지 않지만, 나의 해석은 제갈량이 천하를 셋으로 나누자고 한 게 아니라 천하 하나를 새로 만들자고 했다는 것이다.


원래 중국에는 두 개의 잠재적인 천하가 있다. 황하 일대의 세력과 양쯔강 일대의 세력이다. 첫 번째 천하는 한 제국 황실이다. 조조는 사실상 그 세계의 지배자이면서도 끝내 스스로 황제가 되지 않는다. 대신 황제를 모시고 다닌다. 무능하고 아무 능력치도 없어서 게임으로 만들면 전혀 존재감이 없을 황제를 조조가 열심히 떠받드는 이유는, 황제가 바로 세계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천자는 하늘의 아들이다. 이론상 천하 전부를 지배하는 유일한 인간이다. 명분밖에 없는 공허한 명제이지만, 주관화된 세계인 세상에서는, 또한 그 세상을 정교하게 제도화한 천하에서는 뜻밖에 그 명분이 실리로 환산된다. 그 세계의 주민들이 그 규칙을 따르기 때문이다.


이것은 동양인들의 어리석은 장난 같은 것이 아니다. 서양에서는 교황이 세계다. 중세 유럽 사람들이 종교 지도자인 교황을 굳이 붙들어두었던 것도 조조가 한 일과 같은 행동이다. 어차피 세계는 손에 쥘 수 없다. 대신 세계의 상징물은 잡아 가두거나 협박할 수 있다.


중국의 두 번째 잠재적 천하는 양쯔강 일대에 있다. 북쪽이 유목민의 지배를 받으면 중국인들은 남쪽에 도읍을 정하고 제국을 꾸리곤 한다. 오나라가 차지한 공간이 바로 그곳이다. 오나라 사람들도 좀처럼 제국을 건설했노라고 선언하지는 않지만, 어쨌든 그곳은 제국이 들어설 가능성이 있는 땅이다.


그런데 유비에게는 천하를 세울 세계가 없다. 세계는 이미 다른 사람들의 차지다. 첫 번째 천하를 온전히 빼앗으려는 목표를 갖고 있지만 실현 가능성이 점점 희박해지고 있다. 그때 경력도 시험 점수도 하나 없는 젊은이가 나타나 이런 말을 한다.


“남이 깔고 앉은 세계를 빼앗으려고 하지 말고 새로 하나 만들어서 지배하시면 되죠.”


제갈량의 브리핑이 기가 막힌 것은 바로 이 대목 때문이다. 차라리 세계를 만들자. 지도 밖에 있는 땅, 존재 자체는 알고 있지만 아직은 중국이 아니고 천하가 아니었던 곳으로 가서 새 세계 하나를 지어내자는 계획이다. 당돌하지 않은가. 이쯤은 돼야 듣는 사람도 테이블 쪽으로 슬그머니 당겨 앉으며 간과 쓸개의 위치를 손으로 더듬게 되지 않을까.


그렇다면 어떻게 세계를 만들 수 있을까? 그다음은 책에 나온 대로다. 일단은 오나라와 연합해 조조의 군세를 막아낸다. 그런 다음 소강기를 틈타 형주와 익주를 차지하고 자신만의 한 제국을 세운다. 며칠 밤낮 두 사람이 머리를 맞댔다면 이 세부 계획을 완성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세계를 만든다는 것은 창조주가 되어 세상 만물을 하나하나 만들어낸다는 뜻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것들을 하나로 엮고 눈에 보이는 상징물을 만들어 세상이라는 관념을 만들어내는 일이다. SF 작가의 일과도 비슷한 면이 있는데, 두 사람의 세부 계획에는 이런 작업에 대한 비전도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물론 이런 스토리는 어디에도 나와 있지 않다. 하지만 나는 이 장면을 상상해낸 뒤에야 제갈량과 유비 사이에서 있었던 일을 속 시원히 납득할 수 있었다. 이런 상상을 끼워 넣지 않으면 유비가 제갈량에게 모든 권한을 내어주는 행동은, 원래 연극의 대본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더라도 너무 연극적인 행위가 된다. 소설에서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이처럼 어떤 이야기는, 등장하는 인물을 상세히 분석한 다음 그 모든 것을 합산하는 방식만으로는 온전히 파악되지 않는다. 세계는 엄연히 존재하며 사람들의 삶에 단순한 배경 이상의 영향을 미친다. 세계가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한 인식 자체가 사람들로부터 유래했기 때문이다.


혹시 세계가 사람들의 인식과는 동떨어져서 마음대로 움직이면 어떻게 될까? 세계는, 더 정확히는 세상은, 사람들을 통해 이야기 속으로 발현될 것이기 때문에 그런 걱정을 미리 할 필요는 없다. 세상에 대한 인식 또한 세계를 구성하는 물질적인 요소들과 대등한 정도로 객관적이고 탄탄하기 때문인데, 긴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자세히 다루기로 기약해본다. 혹시 세계가 정말로 자기 마음대로 살아 움직이는 이야기를 보게 된다 해도 그 또한 당황할 일은 아니다. 그저 가장 SF다운 이야기 하나를 알게 된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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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이 들어갈 자리에 살아온 이야기를 짧게 덧붙이자면, 작가로서 나의 장기 전략은 내가 여기에서 소개한 버전의 천하삼분지계와 비슷하다. 데뷔하고 얼마 안 돼서 누구에게 무슨 말을 들었는지, 나는 내가 기존에 있던 시장을 잘라먹기보다는 새 시장을 만들어서 그곳에서 사랑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누군가의 주술이 먹혀들어간 것이다!


비록 나에게는 제갈량이 없고 어디로 가야 세계 하나를 새로 만들 수 있는지 인도해줄 데이터도 없어서 조용히 책상 앞에 앉아 비육지탄이나 하고 있지만, 10년도 넘게 내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는 나의 성장 전략은 다른 누군가의 시장을 빼앗는 일이 아니다. 괜한 의심을 거두어주기 바란다. 그 증거로 나는 새로 시작하는 기획의 첫 주자로 나서는 일이 많았다. 모험적인 제안이 들어오면 의무감이 발동하는 경우가 많았던 탓이다. 아쉽게도 그런 기획의 대부분은 사실 그렇게 새롭지는 않았던 것으로 드러났다. 애초에 시장조사 없이 새 시장을 개척하겠다는 전략은 슬로건 이상의 의미는 없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제갈량은 새 시장이 어디에 있는지에 관한 데이터를 제공한 것만으로도 본부장으로 발탁될 자격이 있는 사람이었다.


갓 데뷔한 신인 작가에게 그런 이상한 주술을 건 사람이 누군지 궁금하지만, 나는 아직 나만의 천하삼분지계를 포기하지 않고 있다. 그때도 출판 시장이 작았던 것은 기정사실이었고 그 뒤로 점점 더 작아진다는 소식만 들려오는 상황에서 다른 방법을 생각하기도 쉽지 않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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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내가 한국 독자들에게 들려준 이야기가 다른 사람들에게서는 듣기 힘들었던 신기하고 재미있는 이야기였기를 바란다. 그리고 언젠가는 나도 나만의 천하를 만들어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야망은 아니고 그냥 이 직업의 수익 구조가 그렇게 생겨먹었기에 갖게 된 소박한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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