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리뷰 ⑥] 끊임없는 독립의 염원을 담다! 독립기념관 제5전시관 “나라되찾기”
일제 강점기(1910~1945) 동안 국내외에서 벌어진 항일 무장투쟁을 중점적으로 다루는 전시관입니다. 이 전시관은 1910년 한일 강제 병합 전후부터 광복까지의 기간을 포괄하며, 독립군의 활동, 의열투쟁, 해외 무장투쟁 등을 통해 조국 독립을 되찾기 위한 한민족의 노력을 최첨단 디지털 기술과 실물 유물 그리고 생생한 재현 디오라마 모형으로 실감 나는 체험을 할 수 있습니다.
전시관은 5개의 존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존은 항일 무장투쟁의 연대기적 흐름을 따라 배치되어 있습니다. 입구부터 출구까지 자연스러운 동선으로 설계되어, 역사적 사건을 차례대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합니다. 주요 테마는 '광복을 위한 항일 무장투쟁'으로, 만주, 연해주, 중국 등 해외 기지에서의 활동을 중심으로 전시 재현해 놓았습니다.
광복을 위한 항일무장투쟁_독립군 기지 개척
1910년 경술국치를 전후하여 민족운동가들은 중국 만주 지역과 러시아 연해주 지역 등으로 이주해 독립군 기지를 개척했습니다. 서간도의 유하 · 통화현 등과 북간도의 용정촌 및 연길현 국자가,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 등이 대표적인 초기 독립군 기지였습니다. 독립운동가들은 이들 지역 한인사회를 바탕으로 자치기관을 세우고 민족학교와 독립군 양성소를 설립해 독립군을 양성했습니다. 서간도에서는 1911년 자치기관인 경학사를 세우고, 이듬해에는 이를 발전시켜 부민단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을 기반으로 신흥무관학교 및 백서 농장을 설립해 독립군 요원을 육성했습니다. 북간도에서는 1910년대 초, 간민회라는 자치기관을 조직해 한인사회를 관리하며 동림무관학교를 세워 독립군을 양성했습니다. 그리고 북만주 독립군 기지에서는 밀산무관학교를 설립해 독립군들을 배출했습니다. 연해주에서는 국내에서 의병 활동을 주도했던 유인석·이범윤 등이 13도의군을 창설해 무장 활동의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1903년 하와이 이민 이후 형성된 미주한인사회는 1910년 대한인국민회가 결성되어 조국광복을 위한 단체로 활동했으며, 1914년에는 박용만 주도로 대조선국민군단이 조직되어 많은 독립군을 배출하였습니다.
간도의 한인 이주지역
한국인의 서북간도 이주는 19세기 중반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이후 점진적으로 증가하던 서북간도의 한국인은 1910년 경술국치를 전후한 시기부터 급증했습니다. 이들 이주 한인들은 척박한 만주벌판에 한인사회를 형성하고 황무지를 개간하여 삶의 터전을 마련했습니다. 그리고 자라나는 2세들에게 민족교육을 시키고, 독립군 기지를 구축하는데 힘을 모았습니다. 이들이 형성한 한인사회는 일제 식민지하 한민족의 맥을 이어가는 물줄기이자 조국광복의 원동력이었습니다.
독립전쟁선포
1919년 3·1운동 이후 우리 민족의 조국광복에 대한 열망은 더욱 고조되었습니다. 서·북간도 및 연해주의 독립운동가들은 항일 독립투쟁의 무장화를 위해 독립 군단을 편성하고 일제를 향해 독립전쟁을 선포하게 됩니다. 독립군의 무장투쟁 활동은 독립 군단의 근거지가 있는 만주나 연해주에 침입한 일본군을 상대로 이루어진 경우도 있었으나 국내에 진입, 유격전을 벌이는 작전이 주류를 이루었습니다. 두세 명 또는 열 명 이상으로 조직된 유격대는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 국내로 진입해 일제의 주요 기관을 파괴하고 요인들을 처단했습니다. 유격전의 주요 활동 지역은 함경도 및 평안도 지역이었으며 특수임무를 띠고 서울 및 그 이남 지역까지 무장투쟁 활동을 벌였습니다.
독립전쟁 현장 체험 디오라마 모형
독립전쟁 현장 체험은 만주 지역의 험준한 오지에서 일본 제국주의 군대와 치열하게 벌어졌던 항일 독립전쟁의 현장을 디오라마(3차원 실물 모형)모형으로 현실감 있게 재현해 놓았습니다.
봉오동 전투
독립군의 국내 진입 유격전은 적극적으로 전개되었습니다. 1920년 6월 4일 약 30명으로 구성된 독립군 유격대는 종성(鐘城) 북방의 강양동(江陽洞)으로 진입해 일제의 헌병순찰대를 격파하고 만주로 귀대했습니다. 큰 타격을 입은 일본군은 2대 중대 병력으로 독립군을 맹추격하였으나 독립군은 만주의 삼둔자(三屯子)에서 일본군 추격대를 또 한 번 대파하였습니다. 이에 격분한 일본군은 다시 약 250명의 병력으로 추격대를 편성해 독립군의 근거지인 봉오동 골짜기까지 진입해 왔습니다. 홍범도 장군이 이끄는 대한독립군, 안무의 대한국민회군, 최진동의 대한군무도독부군 등의 연합 독립군은 봉오동의 지형지물을 이용하여 일본군 추격대를 총공격하여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당시 독립신문에 의하면 봉오동 전투 결과 일본군 전사자 157명 부상자 300여 명이었고, 독립군 피해는 전사자 4명, 부상자 2명뿐이었습니다.
청산리 대첩
독립군의 국내 진입 유격전과 봉오동 전투 등으로 큰 타격을 입은 일제는 서·북간도의 독립군을 토벌하기 위해 암암리에 독립군 탄압 말살 계획을 세웠습니다.1920년 10월 초 일제는 중국 마적단을 매수하여 북간도 훈춘의 일본영사관 분관을 습격하도록하여 그 구실로 중국 영토인 서·북간도에 약 2만 명의 일본군을진입시킵니다. 사전에 정보를 입수한 독립군은 백두산록 서쪽으로 이동하던 중 청산리 계곡에서 뒤쫓아온일본군과 전투를 벌이게 됩니다. 10월 21일부터 10여일 동안 청산리 계곡 일대의 백운평, 완루구, 어랑촌, 천수평, 맹개골등에서 처절한 전투가 전개되었습니다. 여러 독립군단의 독립군들은 김좌진, 홍범도, 지청천, 안무, 이범석 등 뛰어난 지휘관들의 작전과 독립군들의 목숨을 받친 전투 끝에 대승을 이루어 냅니다. 당시 대한민국임시정부 발표에 의하면 청산리대첩 결과, 일본군 전사자는 1,200여 명이며 부상자는 2,100여 명이었습니다. 독립군 측 피해는 전사자 130명,부상자 200여 명뿐이었습니다.
우당(友堂) 이회영
우당(友堂) 이회영 선생(1867~1932)은 조선 명문가 경주 이씨 출신으로, 전 재산을 처분해 만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고 약 3,500명의 독립군을 양성했으며, 신민회와 헤이그 특사 사건을 통해 항일운동을 전개하고, 후기에는 아나키즘 사상을 바탕으로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과 항일구국연맹을 조직하여 평등 사회를 꿈꾸며 독립운동에 헌신하다 1932년 일제의 고문 후유증으로 다롄 감옥에서 순국한 대한민국 독립운동가입니다.
독립군단의 편성과 활동
3·1운동으로 민족의 독립 의지를 확인한 서·북간도의 독립군들은 축적된 역량을 결집하여 독립 군단을 결성하였습니다. 서간도 지역에서는 1919년 4월 국내에서 의병 활동을 전개했던 박장호·전덕원·조맹선 등이 이 지역의 의병들을 모집해 대한독립단을 결성하였고, 이희삼·이동백 등은 장백현에서 대한독립군비단을, 김승만·안병찬 등은 안동과 관전현을 기반으로 대한청년단연합회를 결성하였습니다. 1919년 11월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서간도 지역 군정부인 서로군정서가 탄생하였습니다. 이 밖에도 태극단·광복단·대진단·흥업단·백산무사단 등의 독립 군단이 결성되었습니다. 북간도 지역 왕청현에서 1919년 12월 서일·김좌진이 이끄는 북로군정서가 탄생하였습니다. 서로군정서와 함께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군정부로 결성된 독립 군단이었습니다. 국내에서 의병활동을 전개했던 홍범도는 연길현 명월구에서 대한독립군을 조직했고, 1920년에는 북간도 한인사회를 총괄해 이끌던 대한국민회가 산하에 대한국민회군을 조직했습니다. 결성 초기부터 활발한 국내 진입 작전을 전개한 최진동이 이끈 대한군무도독부는 왕정현 춘화향 봉오동에 본부를 두고 활동하였습니다. 이 외에도 대한의군부·훈춘한민회·대한신민단·의민단 등의 독립 군단이 결성되어 항일 무장 활동을 전개해 나갔습니다.
간도 참변
봉오동과 청산리 등 독립군에게 대패한 일본군은 그 보복으로 독립군의 모체인 한인사회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과 독립군 기지 파괴 등 인면수심의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우선 독립군이 떠나 북간도 연길현 명월구의 대한독립군 병영과 하마탕의 대한국민회군 근거지를 초토화하고 왕청현 십리평의 사관연성소를 파괴하였습니다. 한인사회로 눈을 돌려 민족학교, 교회까지 한인들이 만든 공공시설은 모두 불태우고 파괴하였습니다. 용정촌 동북쪽의 장암동에서는 33명의 남자를 교회에 가두고 불을 질러 몰살시키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일본군의 보복성 만행은 이듬해 4월까지 이어졌고, 가장 만행이 심했던 1920년 10월과 11월 두 달간 한인사회의 피해는 피살자 3,664명, 피체자 155명이었고, 민가 3,520채, 학교 59개교, 교회 19개소와 곡식 59,970섬이 약탈과 파괴에 불타 없어졌습니다.
자유시 참변
청산리대첩 후 독립군들은 북만주의 밀산을 거쳐 러시아의 도움을 기대하며 1921년 초 이만에 도착했습니다. 이곳에서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군정서와 일부 독립 군단은 러시아의 원조를 기대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북만주로 돌아갔으며, 반면 홍범도·지청천·안무·최진동이 이끄는 독립군들은 그해 3월 자유시에 도착했습니다. 자유시를 기반으로한 대한의용군과 고려혁명군의 세력다툼에 휘말리게 되고 일제의 압력을 받은 러시아 측은 독립군을 무력화하기 위해 무장해제를 시도했습니다. 이런 상황에 만주 지역 독립군이 가담한 대한의용군과 고려혁명군 간에 대충돌이 일어나 수백 명의 독립군들이 사망하거나 행방불명되었고 420여 명의 독립군들이 러시아군에 체포되어 갇히고 강제노역에 시달렸습니다.
민족유일당운동
1920년대 중반 한국인 독립운동 진영에서는 국내외에 산재한 모든 독립운동 단체를 하나로 통합하자는 민족유일당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각 독립 단체가 주장하는 이념과 노선을 하나로 통일해 민족적 대동단결을 이루고자 하는 운동이었습니다. 만주 지역의 독립운동 단체들도 이 운동에 적극 동참하여 1927년 초부터 민족유일당 결성을 위한 모임을 개최했습니다. 이 회의에는 참의부·정의부·신민부 등 3부는 물론 남·북만주의 거의 모든 독립운동 단체가 참여했습니다. 그러나 2년여에 걸쳐 논의된 민족우일당운동은 각 단체 간의 견해차로 인해 두 갈래로 나뉘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하나의 단체로 통합을 이루지 못하고 새로운 독립운동 통합체로 북만주를 근거지로 한 혁신의회와 남만주를 활동무대로 하는 국민부를 조직하게 되었습니다.
1930년대 독립 군단 활동
만주 지역의 민족유일당운동 결과 새로운 독립운동 통합체로 혁신의회와 국민부가 탄생했습니다. 남만주의 대표단체로 설립한 국민부는 이당치국을 목표로 1929년 12월 조선혁명당을 결성하고 그 소속 무장단체로 조선혁명군을 조직했습니다. 북만주의 혁신의회 또한 같은 목표를 내세워 1930년 7월 한국독립당을 결성하고 소속 무장단체인 한국독립군을 편성하였습니다. 한편, 1930년대 중반에는 만주의 각 지역에서 활동하던 사회주의 계열의 항일 유격대들이 중국공산당의 지시로 항일민족통일전선 성격의 동북인민혁명군을 조직했습니다. 이 중 남만주와 북간도 지역을 무대로 활동한 동북인민혁명군은 1936년 1월 동북항일연군으로 재편성되었고 그 산하에 한인 유격대를 편성하여 국내 진입 유격전을 펼쳤습니다.
대한국인 안중근 의사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는 중국 하얼빈역에서 한국 침략의 원흉이자 동양 평화를 파괴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여 일제 침략의 부당성을 전 세계에 알렸습니다.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난 안중근 의사는 1907년 러시아 연해주로 망명하여 의병부대를 이끌며 국내 진공작전을 전개하였으며, 1909년 2월에는 동의단지회를 결성하여 독립투쟁에 대한 굳건한 의지를 다짐했습니다. 하얼빈역 이토 히로부미 저격 의거 후 현장에서 체포된 안중근 의사는 법정에서 의거의 정당성을 당당히 알렸으며, 옥주에서는 ‘동양평화론’을 집필하여 제국주의에 반대하고 진정한 세계 평화를 모색한 그의 사상을 담았습니다.
자결로 항거한 열사들
을사늑약, 경술국치 등 국권 침탈의 현실을 개탄한 일부 민족 지사들은 자결 순국의 길을 택했습니다. 주영 공사 서리 이한응은 주영 한국 공사관 폐쇄에 항거하여 자결하였고, 대한제국의 대신 조병세·민영환 등도 을사오적 처단과 을사늑약 무효를 주장하며 자결하여 의병 전쟁 등의 항일운동을 격화시켰습니다. 1910년 경술국치 직후에는 황현·정재건·장태수 등 애국지사들이 순국하였습니다. 일제가 통치하는 ‘명치(明治)’의 세상에서는 살지 않겠다는 열사들의 순국은 일제의 식민 통치를 거부하는 강력한 의사 표현이자 주권 회복을 열망하는 강렬한 항일투쟁이었습니다.
의열단
1919년 11월 만주 길림성에서 조직된 의열단은 1920년대 가장 활발한 의열투쟁을 전개한 단체였습니다. 단장은 김원봉이었으며, 강세우·곽재기·권준·김상윤·배중세·서상락·신철휴·윤세주·이성우·이종암·한봉근·한봉인 등이 창립 단원이었습니다. 의열단은 일제 침략 기관의 파괴와 침략 원흉 응징 등을 활동 목표로 설정하였고, 구축왜노·광복조국·타파계급·평균지권을 주요 이념으로 채택했습니다. 이를 위해 조선총독부 등 일제의 고관대작 등을 처단 대상으로 정하고 조선총독부·동양척식주식회사 등 주요 기관을 파괴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식민지 한국을 지배하는 중추 기관을 파괴하고 그 수뇌들을 처단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의열단 단원들은 이 활동 목표 달성을 위해 국내와 일본 등에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의거를 일으켰습니다.
아나키스트의 항일투쟁
1920년대 중반 한국 독립운동 진영에는 무정부주의운동이 수용되었습니다. 독립운동 선상에 있어 무정부주의는 정부를 부정하는 이념이 아니라 공산주의운동에 대응하고 반인륜적인 폭력적 지배자, 즉 일본 제국주의를 부정하고 이에 투쟁하는 논리로서 수용되었습니다. 일본에서는 1920년대 박열·서상한·김중한·양일동 등이, 중국에서는 이회영·신채호·유자명·유림 등이 무정부주의 이념을 받아들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또 1930년 4월에는 중국 상하이에서 백정기·원심창·이강훈 등이 남화한인청년연맹이라는 무정부주의 의열투쟁 단체를 조직하여 활동했습니다.
한인애국단 활동
한인애국단은 1920년대 중반 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의여러 가지 어려움을 극복하고 한편으로는 만보산사건과 만주사변 등으로 침체한 독립운동의 활로를 모색하는 과정에서 임시정부의 국무회의를 거쳐 의결되고결성된 ‘임시정부의 특무대’이었습니다. 한인애국단은 결성 직후부터 단장인 김구의 주도하에 많은 활동을 하였습니다. 그결과 만보산사건, 이후 경직된 한·중 양 민족 간의 감정이 완화되었고,중국 정부의 임시정부에 대한 지원과 협조가 이루어지는 등 임시정부 활동에 커다란 전기가 마련되었습니다.
윤봉길 의사의 홍커우공원 의거
1932년 4월 29일 일제가 상하이(上海) 홍커우(虹口)공원에서 자행한 일왕 생일 및 상하이사변 승전 기념식장에서 일제의 침략 수뇌부들을 처단하기 위해 사제폭탄을 던진 윤봉길 의사의 의거입니다.
이봉창 의사의 일왕 히로히토 처단 의거
한인애국단 최초의 단원인 이봉창 의사는 김구에게 한국 침략의 원흉인 일왕을 처단하겠다고 자원하여 태극기 앞에서 선서문을 목에 걸고 입단식을 거행하였습니다. 일본에 도착한 이봉창 의사는 1932년 1월 8일 관병식을 마치고 돌아가는 일왕 히로히토를 처단하기 위해 폭탄을 던졌으나 폭탄의 위력에 행렬은 아수라장이 되었지만, 일왕을 처단하지는 못하였습니다. 이후 이봉창 의사는 일제에 체포되어 1932년 1월 일본의 이치가와 형무소에서 순국하였습니다.
한국광복군
1919년 4월 정부 수립 직후부터 산하에 국군을 조직한다는 계획이 있던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30년대 후반부터 그 계획을 실행에 옮겼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미주 동포들의 성금으로 재정을 마련하고 중국 군관학교 출신 한국 청년들과 만주 독립군 출신들로 인적자원을 기초로 1940년 9월 17일 중국 충칭에서 한국광복군을 창설하였습니다. 한국광복군은 일본군을 탈출한 학병과 중국 내에 흩어져 살고 있던 한인 청년들을 적극적으로 모집하여 세력을 키웠습니다. 그리고 중국 시안에 총사령부를 설치하고 충칭·라오허커우·진화·푸양 등에 지대를 설치하여 항일 무장 활동을 전개하였습니다.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임시정부는 대일 선전포고를 발표하였습니다. 이후 광복군은 미군 전략첩보국(OSS)과 국내 진입 작전을 위한 합동군사훈련을 실시하고 인도·미얀마 등에 파견되어 연합군의 일원으로 광복이 되는 그날까지 조국의 자주 독립군으로 활동하였습니다.
국방경위대(맹호군)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재미한족연합위원회는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1942년 2월 독립 군단인 맹호군을 창설하였습니다. 1942년 8월 29일 경술국치 32주년을 맞아 로스앤젤레스 시청에 조국의 광복 의지를 다지며 태극기를 게양하는 현기식을 거행하였고, 1943년 1월에는 샌프란시스코에 맹호군 지대를 편성하였습니다. 1944년 후반부터 미군 전략첩보국(OSS)의 납코프로젝트(Napko Projetc)에 의해 국내 진입을 위한 특수 훈련을 받았습니다. 일본제국주의의 무조건 항복으로 작전은 실행할 수 없었으나 미주 지역 한인들의 조국 독립에 대한 열의와 성의를 보여준 활동이었습니다.
제5전시관 '나라되찾기' 관람을 마치고
제5전시관 '나라되찾기'는 독립기념관의 핵심 전시관 중 하나로, 항일 무장투쟁의 역사적 사실과 의의를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생생한 재현 디오라마 모형, 유물, 멀티미디어 요소가 조화된 체험으로 항일 독립 무장투쟁의 역사를 사실감 있게 느낄 수 있었으며. 특히, 3·1운동 이후의 항일투쟁 흐름을 따라가며 우리 민족의 독립 의지를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전체 7개 상설 전시관 중 제5전시관을 필수 관람 코스로 추천해 드리며 특히 청소년 관람을 강력히 추천하는 전시관입니다. 다만, 입체적이고 생동감 있는 최첨단 역사 체험 공간으로 재개관한 지난 2009년 8월 12일로부터 16년이나 지난 지금 전시 공간 부분 훼손, 전시물 관리 허술, 새로 발굴된 역사적 사실을 기반한 내용 업그레이드 등 전체적인 보수와 관리의 손길이 시급해 보였습니다.
제5전시관 '나라되찾기' 관람을마치고 제6전시관 ‘새로운나라’로 이동 중 맞이하게 되는 늠름한 기백으로 우뚝 서 있는 독립운동가 동상. 좌부터윤봉길 의사, 안중근 의사, 홍범도 장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