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엘리의 도시는 말한다]㉖성수동, 수제화에서 스타트업까지–공간의 재해석

현대의 도시는 단순한 생활공간이 아닌 경제 전략의 최전선이다. 세계 각국은 도시 브랜드를 기반으로 투자 유치, 글로벌 인재 확보, 스타트업 생태계 형성 경쟁을 펼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름’은 곧 ‘전략’이며, 도시 간 경쟁력의 상징적 신호로 기능한다. 본 연재는 글로벌 도시의 지명 유래를 통해 경제, 역사, 문화, 외교의 맥락을 통합적으로 조명하고, 독자에게 도시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고자 한다. [편집자주]
이름에 담긴 물의 기억과 도시의 뿌리
성수동의 이름은 물에서 비롯되었다.
조선시대 이 지역에는 왕실의 말을 기르던 선수원(牲畜園)이 있었다. 말들이 물을 마시던 샘이 있어 ‘성수(聖水)’라 불렸다. 맑은 물이 흐르는 한강가의 마을. 이름부터가 ‘생명과 생산의 터전’이다.
성수동은 일찍부터 도성의 외곽이자 생산의 공간이었다. 한강이 가까워 물류와 공업이 발달했고, 1960~1980년대에는 제재소와 철공소, 수제화 공장이 밀집했다. 당시 성수동의 풍경은 ‘가죽의 냄새’로 기억된다. 좁은 골목마다 공장 문이 열리면 망치 소리와 본드 냄새가 섞였고, 장인들은 작은 조명 아래서 구두의 곡선을 다듬었다.
과거 성수동은 말 그대로 ‘손의 도시’였다. 구로공단이 전자·기계 산업 중심의 대량생산지로 서울 산업화의 뼈대를 이루었다면, 성수동은 세밀한 기술과 장인정신이 모인 손끝이었다. 구두의 곡선을 다듬는 장인의 손, 철을 두드리는 리듬, 본드 냄새가 스며든 작업복, 그 모든 것이 서울의 산업을 완성시켰다.
그러나 1990년대에 접어들며 산업 구조가 바뀌자, 이 손끝은 점차 도시의 가장자리로 밀려났다. 공장은 문을 닫았고, 붉은 벽돌 건물과 녹슨 철문만이 남았다. 좁은 골목마다 들리던 망치 소리는 사라지고, 그 자리를 적막이 대신했다.
성수동의 시간은 그렇게 멈춘 듯 흘렀고, 사람들은 이곳을 점점 잊어가는 듯했다.
쇠락한 공업지대, 감각의 도시로 거듭나다
성수동은 2000년대 중반 이후 조용히 변화하기 시작했다. 새로 짓는 대신 낡은 공간을 고쳐 쓰는 실험이 이어졌다. 철공소였던 건물엔 카페가 들어섰고, 제화공장이던 2층 건물은 갤러리와 쇼룸으로 바뀌었다. 페인트를 덧칠하지 않아 드러난 콘크리트 벽과 노출된 철골, 그 ‘날것의 질감’이 오히려 젊은 세대를 끌어들였다. 이 변화의 배경에는 서울숲의 등장이 있다.
공원과 한강이 만나는 풍경이 성수동의 공기를 바꾸자, 도심 속 숨 쉴 틈을 찾던 기업과 예술가들이 이곳으로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대림창고, 언더스탠드에비뉴, 아모레성수, 피크닉, 블루보틀 등 성수의 이름을 브랜드화한 공간이 잇달아 들어섰다.
이들은 단순한 상업 시설이 아니었다. 건물 하나하나가 공간을 콘텐츠로 만드는 말그대로 실험이었다. 한때 생산의 현장이던 공장들이, 이제는 브랜드가 스스로를 ‘생산하는 무대’가 된 것이다. 성수동은 서울의 주변부에서 감각 산업의 중심으로 옮겨왔다.
산업의 전환, 공간의 재해석
2010년대 후반, 성수동은 또 한 번의 변화를 맞이했다. 이제 이곳은 더 이상 카페 거리나 복합문화지구에 머물지 않게 되었다. 스타트업과 벤처, 크리에이티브 기업의 거점으로 재편되며, 서울에서 가장 역동적인 산업 생태계를 품은 지역으로 성장했다.
네이버 D2SF, 카카오벤처스, 패스트벤처스, 각종 IT 스타트업과 크리에이티브 에이전시가 잇달아 이곳에 자리했다. 이들은 유리 빌딩 대신, 천장이 낮고 질감이 살아 있는 오래된 건물을 택했다. 왜냐하면 성수동은 그 자체로 브랜드를 만드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과거 장인들이 수제화를 만들던 공방은 이제는 디자이너가 브랜드를 만들고, 창업자가 아이디어를 빚는 공방으로 변했다. 그 과정에서 부동산의 개념도 달라졌다.
토지의 가치보다 공간의 맥락이 가격을 결정하기 시작했다. 건물의 연식보다 그 공간이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는지가 더 중요해졌다. 성수동은 단순한 재개발의 결과가 아니라, 시간을 재해석한 도시 경제의 모델인 것이다.
물론 성장의 속도만큼 그림자도 있다. 임대료 상승, 원주민 이탈, 과도한 상업화는 여전히 논란거리로 남아있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성수동이 보여주는 본질은 분명하다. 공간은 산업이 될 수 있고, 장소는 브랜드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맺음말 – 도시, 다시 쓰기의 힘
성수동의 변화는 단순한 ‘뜨는 동네’의 이야기가 아니다.
쇠락한 공업지대가 어떻게 도시의 중심으로 돌아올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실험이자, 공간이 산업의 형식을 바꿔놓은 사례다.
수제화 장인이 두드리던 망치 소리, 창업자가 노트북을 두드리는 키보드 소리. 두 소리는 다르지만,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손의 도시로서 그 본질은 같다고 본다. 성수동은 우리에게 말한다. 도시는 새로 짓는 것이 아니라, 다시 읽는 것이라고.
오래된 공간에 새로운 산업과 감각을 덧입히는 일과 그 창조적 전환의 과정이야말로 오늘의 한국 지역경제가 서 있는 진정한 출발선이며 도시 경쟁력을 재정의하는 가장 현실적인 방식일 것이다.
장엘리 동명대학교 글로벌비즈니스학과 초빙교수 labmoneta618@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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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엘리 교수는 동명대학교 글로벌비즈니스학과 초빙교수이자, 국립외교원/외교부 외래교수, 글로벌 커뮤니케이션 전략 컨설팅사 랩 모네타(Lab MoNETA) 대표 컨설턴트다. 방송 및 언론 분야에서 오랜 경력을 가진 그는 삼표그룹 홍보팀장을 역임했고, 한국경제TV, 내외경제TV, 아리랑TV 등에서 앵커 및 콘텐츠 기획자로 활약했다.
현재는 도시 기반의 경제 커뮤니케이션 전략, 스타트업 국제 진출 컨설팅, 글로벌 IR 피칭 등을 지원하며, 공공기관과 민간기업을 연결하는 실전형 컨설턴트로 활동 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