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 Cul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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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리뷰] 독립기념관 ② 선사시대부터 조선 후기까지 '겨레의 뿌리'

[리뷰타임스=노털카|리뷰어]

제1관 겨레의 뿌리(The Origin of the Korean People)

제1관 ‘겨레의 뿌리’는 선사시대부터 조선 후기까지 우리 민족의 유구한 역사와 찬란한 문화, 그리고 불굴의 의지와 대외 항쟁에 대해 전시하고 있습니다.

 

제1관 겨레의 뿌리


한반도를 중심으로 동북아시아 지도를 펼쳐 놓은 멀티 스크린

입구를 들어서면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동북아시아 지도가 멀티 스크린 위에 펼쳐집니다. 구석기와 신석기 시대를 거쳐, 우리 겨레의 첫 국가인 고조선의 청동기 시대, 그리고 가야, 고구려, 백제를 아우르는 철기 시대까지! 고려와 발해, 그리고 세계적으로 최고의 기록 문화를 가진 조선 후기의 유물과 기록물들이 시대순으로 관람하기 편리하게 전시되어 있습니다.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동북아시아 지도를 펼쳐 놓은 멀티 스크린


고인돌(支石墓/Dolmen)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무덤 양식인 고인돌은 한반도를 포함한 동아시아뿐만 아니라 유럽, 동남아시아 등 세계 여러 지역에 널리 분포하고 있습니다. 전 세계에 걸쳐 약 7만에서 8만 개의 고인돌이 존재하는데, 그중 절반에 가까운 약 4만 개가 한반도 전역에 분포하는 것으로 추산됩니다. 특히 가장 조밀하게 분포된 지역은 전북 특별자치도 고창부터 전라남도 전역에 이르는 지역으로, 약 2만 2천여 개 이상의 고인돌이 알려져있습니다. 

 

강화군 하점면 부근에서 발견된 고인돌 모형

 

고인돌 내부의 유골 모형

 

고인돌 축조 과정을 재현해 놓은 미니어처

 

민족의 기원

우리나라의 구석기 시대는 약 70만 년 전부터 시작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구석기인들은 다듬어지지 않은 뗀석기(구석기인들이 돌을 깨뜨려 만든 석기)를 도구로 사용하였으며, 주로 동굴이나 강가에서 모여 살면서 사냥, 낚시, 그리고 채집 생활을 하였습니다. 특히 경기도 연천 전곡읍 전곡리의 구석기 유적에서는 제작 기법이 상당히 세련되고 우수한 주먹도끼가 발견되어, 한반도에 매우 발달한 석기 문화가 존재했음을 입증하였습니다.

신석기 시대는 대략 기원전 8,000년 무렵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구석기 시대와 달리, 신석기인들은 용도에 맞게 돌을 갈아서 만든 간석기(돌을 갈아서 용도에 맞게 만든 석기)를 사용한 것이 특징입니다. 이들은 강가나 바닷가에 움집을 짓고 고기를 잡거나 채집 생활을 하였으며, 신석기 후기에 이르러 가축을 기르고 농사를 짓기 시작하였습니다. 한반도 전역의 강가나 바닷가에서 발견된 빗살무늬토기는 당시 농사로 수확한 곡물이나 음식을 저장하는 용도로 사용되었으며, 주술과 관련된 예술 행위가 반영된 것으로 유추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선사시대 유적지와 유물

 

구석기시대 유물 ‘주먹도끼’

 

신석기시대 유물 ‘빗살무늬토기’

 

울산 울주군 두동면 ‘천전리 암각화’

‘천전리 암각화’는 선사시대(신석기시대)에서부터 신라시대까지 다양한 시대에 기록되었습니다. 마름모 혹은 정사각형, 원, 꽈배기 모양 등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알기 어려운 기하학적인 도형 등이 다양하게 새겨져 있는데, 대부분의 도형이 이중선으로 새겨져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그리고 그림 중에 돛을 단 배, 말, 용, 기마행렬도 같은 그림은 신라시대에 새겨진 그림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울산 천전리 암각화 모형

 

우리 겨레의 첫 나라, 고조선

기원전 2000년경 청동기 시대에는 본격적으로 벼농사가 시작되면서 많은 재산과 힘을 가진 권력자가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이는 곧 나라의 탄생으로 이어졌으며, 우리 민족의 첫 나라인 고조선도 이 무렵에 건국되었습니다. 일연의 《삼국유사》에는 단군왕검이 기원전 2333년에 고조선을 건국했다고 기록되어 있어, 단군을 우리 민족의 시조로 여깁니다. 고조선은 대동강과 요하 부근을 중심으로 발전하였으며, 기원전 4~3세기경에는 중국의 연나라와 다툴 정도로 성장하였습니다. 고조선은 중계무역을 통해 넓은 영토를 지닌 부강한 나라로 성장하였으나, 이를 두려워한 한나라의 침입으로 멸망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고조선의 유민들은 남으로 이주하여 삼한 사회와 고대 삼국의 형성에 크게 이바지했습니다.

 

청동기시대의 유물

 

고구려 광개토대왕릉비

고구려의 20대 태왕인 장수왕은 414년(장수왕 3년)에 아버지이자 19대 태왕인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찬양하고 추모하기 위해 능묘 곁에 비석을 세웠습니다. 이 비석에는 고구려 왕실의 연원, 광개토대왕의 정복 활동, 그리고 왕릉의 수묘인 규정 등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4면을 분리한 광개토대왕릉비 전시 모형


고구려 무용총(舞踊塚)

고구려 시대에 만들어진 무덤인 무용총은 중국 지린성 지안시에 있으며, 광개토대왕릉비 북서쪽 약 1km 지점에 각저총과 나란히 있습니다. 이 무덤은 대략 5세기 무렵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처음 발굴 조사 당시 내부 벽면에 그려진 5명의 남녀 군무상(群舞像)을 보고 무용총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모형 무용총 입구

 

수렵도(狩獵圖)가 그려진 내부 벽면

 

기마도(騎馬圖)와 주방 등의 가옥 2동 외에 5명의 남녀 군무상(群舞像), 9명의 합창대상(合唱隊像)이 그려진 내부 벽면

 

연화문 등의 장식문 사신도(四神圖)·일월상도(日月象圖)가 그려진 천장

 

산성의 나라 고구려

고구려는 중국과 달리 교통의 요충지에 방어 상 유리한 산성을 쌓은 것이 특징입니다. 방어시설인 치와 옹성이 있었고 견고한 성을 유지하기 위해 위로 올라가면서 얇아지는 퇴물림 쌓기 방식으로 축조하였습니다.

 

고구려의 산성 축조 모습을 재현한 미니어처


철의 나라 가야

가야는 철의 왕국이라고 불릴 정도로 철 생산지로서 명성이 높았으며, 철을 매개로 국제 무역항의 역할을 하였습니다.

 

노천에서 철을 채취하여 제련하는 모습을 재현한 미니어처


가야 기마무사상과 고구려 기마무사상 모형

 

고구려 살수대첩

살수대첩은 612년 고구려가 중국 수나라 113만 대군의 침입을 물리친 전쟁입니다. 수나라의 30만 별동대가 살수(청천강)를 건널 때 을지문덕 장군이 이끄는 고구려군의 기습으로 진영이 무너진 수나라 별동대가 몰살한 전투입니다.

 

살수대첩을 재현한 미니어처

 

신이 내린 백제인의 기술

백제금동대향로는 1990년 12월 능산리 절터의 서쪽 한 구덩이에서 발견되었습니다. 능산리 절터는 성왕을 기리기 위한 백제 왕실의 원찰로 추정됩니다. 금동대향로는 국가적 제의와 같은 의식에 사용된 것으로 보이며, 중국 향로의 영향을 받았지만, 그 형태와 내용에서 우수한 차별성이 나타납니다. 무엇보다도 백제인들이 추구하는 이상향을 향로에 담아내었고, 뛰어난 금속공예 기술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 외에도 의례용 금동신발, 왕릉을 지키는 상상의 동물 조각상인 돌 짐승상 등은 백제의 7세기 초 우수한 공예와 미술 문화, 종교와 사상까지도 파악할 수 있게 해주는 소중한 문화유산입니다.

 

좌 : 백제금동대향로, 우위 : 금동신발, 우아래 : 돌 짐승상

 

백제 서산마애삼존불상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에 있는 바위에 새겨진 백제 예술과 종교의 섬세함과 화려함 그리고 기술력이 돋보이는 불상 조각입니다. 세 가지 불상이 모두 입가에 오묘한 미소를 머금고 있어 ‘백제의 미소’라고 불리는 불상으로 국보 제84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서산마애삼존불상

 

백제 미륵사탑

미륵사에는 백제의 국력을 과시하고 미륵의 힘을 통해 불국토를 만들고자 하는 염원이 담겨 있습니다. 중앙의 목탑과 동서 양쪽의 석탑 등 3탑 3금당 양식이며, 현재는 서쪽의 석탑만 남아있습니다. 미륵사지석탑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되고 거대한 석탑으로, 목탑에서 석탑으로 넘어가는 과도기 양식입니다. 최근, 이 탑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사리함과 금제사리봉안기를 비롯하여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이에 따르면 639년 (무왕 40) 왕비인 사택왕후가 미륵사를 창건하였다고 합니다.


미륵사탑 중앙 목탑 양쪽 동서 석탑, 탑돌이 재현 미니어처

 

신라 황룡사9층목탑

황룡사는 신라의 대표적인 사찰로 진흥왕이 경주 월성 동쪽에 궁궐을 짓는 도중에 황룡이 나타나자 대신 절을 짓고 황룡사라 하였습니다. 황룡사9층목탑은 643년 선덕여왕 때 건립되었습니다. 각 층은 신라 주변 아홉 나라를 상징하는 것으로, 불교의 힘을 빌려 나라를 보호하고 주변 국가를 제압하고자 하는 신라 중심의 세계관을 잘 보여줍니다.


황룡사9층목탑 모형과 예불 의식 미니어처


신라 얼굴무늬 막음기와

1990년대 초반, 모 대기업의 심볼마크 디자인 모티브가 되었던 신라인의 얼굴을 대표하는 얼굴무늬 막음기와는 선덕여왕 대에 창건된 경주 영묘사 터에서 발견되었습니다. 막음기와에는 일반적으로 연꽃무늬나 당초무늬가 사용되지만, 이 기와는 사람의 얼굴 모습을 하고 있어, 특히 눈길을 끌었습니다. 눈을 지그시 감고 엷은 미소를 짓고 있는 신라인의 얼굴은 살아있는 듯 자연스럽습니다. 또한, 기와의 뒷면에는 실제 건물에 사용된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얼굴무늬 막음기와

 

신라 황룡사 치미

황룡사 금당 지붕의 용마루 끝에 장식되었던 큰 기와로 높이 186cm, 너비 105cm의 실물 크기로 복원되어 전시 중입니다. 치미 양쪽 측면에 8엽 연꽃과 사람 얼굴 형상의 문양을 새겨 놓았는데 신라인의 뛰어난 예술 감각을 엿볼 수 있습니다.


‘황룡사 금당 치미’ 복원 모형

 

신라방

8세기 중반 이후, 신라는 중국 당나라와의 활발한 교류 과정에서 상인, 유학생, 승려 등이 자연스럽게 중국으로 건너가 작은 신라 사회를 이루고 살게 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거주 지역과 경작지가 형성되었고, 행정 기구인 신라소와 사찰인 신라원 등이 들어섰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동북아시아에서 신라인들의 영향력이 높았음을 잘 보여주는 사례로, 중국 속의 작은 신라, 즉 신라방의 존재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초가집과 기와집, 골목길까지 세세하게 잘 표현한 ‘신라방’ 미니어처

 

고려 귀주대첩

한국 역사에서 3대(살수대첩, 귀주대첩, 한산도대첩)대첩으로 중 하나로 꼽히는 귀주대첩. 1019년 고려 장군 강감찬이 소배압이 이끌었던 거란의 10만 대군을 물리친 전쟁으로 압록강 동쪽의 강동 6주를 지키게 되었습니다.

 

귀주대첩을 재현한 미니어처

 

신비의 정점을 찍은 예술혼, 고려청자!

처음에는 중국의 영향을 받았으나, 독자적인 발전을 통해 차별화된 기술력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신비로운 고려 비색과 도자기 표면에 조각된 홈에 다른 재료를 넣는 상감 기법을 사용하여, 은은한 청록색의 푸른빛과 생동감 있는 문양, 아름다운 조형미를 지닌 고려청자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도자기 제작 과정을 재현한 미니어처

 

고려의 금속활자

1236년부터 1251년까지 약 16년에 걸쳐 완성된 목판활자 팔만대장경은 몽골 침략을 불교의 힘으로 극복하고자 만들어졌습니다. 또한, 1234년에 금속활자로 간행된 ‘상정고금예문’은 실물로는 현재 남아있지 않지만, 독일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1450년)보다 200년이나 앞선 세계 최고의 인쇄술 보유국으로 평가받습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은 1377년 청주의 흥덕사에서 간행한 ‘직지심체요절’로, 현재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이 책은 고려가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 인쇄술을 발명했음을 증명하며, 2001년에는 유네스코 기록 유산으로 등록되었습니다.

 

고려의 금속활자 전시 코너

 

고려 금속활자와 활자 가지쇠

 

1377년 간행한 금속활자본 ‘직지심체요절’과 세계 최초의 사라진 금속활자본 ‘상정고금예문’의 존재를 언급한 이규보의 시문집 동국이상국집


합천 해인사에 소장중인 대장경판


대장경 탁본 작업을 재현한 미니어처

 

임진왜란

임진왜란은 1592년(선조 25년)부터 1598년까지 두 차례에 걸쳐 조선을 침략한 일본과의 전쟁입니다. 전쟁 초반에는 일본의 기세에 눌려 엄청난 시련을 겪었으나, 이순신 장군의 재해권 장악과 전국에서 봉기한 거국적 병력 및 승병의 활약으로 끝내 조선이 승리한 전쟁입니다. 


한산도 대첩 ‘학익진’을 재현한 미니어처

 

명량해전을 재현한 미니어처

 

노량해전을 재현한 미니어처

 

난중일기

 

조선 정조 때 사용했던 거북선을 기초로 전쟁 상황을 1/25로 축소한 모형 거북선

 

임진왜란 당시 활약한 ‘신기전기화차’ 축소 모형

 

조선의 기록문화

성리학에 기반을 둔 사대부가 지배층을 이루면서 민족적이고 자주적인 성격의 문화가 크게 발달하였습니다. 관료와 학자들은 학문과 문화를 발전시키기 위해 역사서, 지리서, 윤리서, 법전 등 다양한 기록물을 작성하고 편찬하였습니다. 특히, 세종대왕의 훈민정음 창제는 백성들이 언어와 문자 생활의 불편함을 없애고 삶이 개선되며 교화되어 문화적, 사회적 발전에 이바지했습니다. 대표적인 기록유산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 역사서: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비변사등록’, ‘동국통감’ • 인문 지리서: ‘동국여지승람’, ‘여지도서’ • 법전: ‘경국대전’ • 농사 및 의학 서적: ‘농사직설’, ‘동의보감’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

 


훈민정음 해례본과 월인천강지곡

 

준호구, 1858년 평양부에서 작성된 김종대의 생년월일과 본적 등이 기재되어 있는 문서

 

조선의 과학기술

조선은 통치 이념을 농업과 백성을 중심으로 삼았기에 농업에 필요한 과학 기술을 크게 발전시켰습니다. 특히, 세종대왕은 통치 기간 관노였던 장영실을 발탁하여 다음과 같은 혁신적인 기구를 발명하였습니다, • 측우기: 강수량을 측정하는 기구 • 앙부일구: 태양의 움직임으로 시간을 측정하는 해시계 • 자격루: 물의 흐름을 이용하여 자동으로 시간을 알려주는 물시계, 조선의 과학 기술은 천문학, 지리학, 농학, 의학, 군사 무기 등 다양한 분야에서 세계에 내놓아도 뒤처지지 않는 최고의 수준이었습니다.

 

지구를 본떠 만든 작은 모형 ‘지구의’, 강수량을 측정하는 ‘측우기’

 

해시계 ‘앙부일구’


1935년 (태조 4년) 권근 등 12명의 천문학자들이 만든 현존하는 최고의 석각천문도 ‘천상열차분야지도 각석’


물의 흐름을 이용하여 자동으로 울리게 만든 물시계 ‘자격루’ 모형

 

제1관 ‘겨레의 뿌리’ 관람을 마치고

우리 겨레의 선사시대부터 조선 후기까지 시대별로 잘 정리된 유물과 전시물, 그리고 때론 체험을 제공하는 동선을 따라 관람하였습니다. 다만 몇 가지 아쉬운 점으로, 첫째 조명 문제, 전체적인 조명이 다소 어두워 전시물의 세부 사항을 잘 확인하기 어려웠던 점. 둘째 전시물 받침 시설, 투명 아크릴 또는 유리 선반으로 전시된 물품은 조명 빛이 반사되어 전시물의 디테일이 잘 보이지 않았던 점. 이러한 점들을 고려해서 좀 더 세심한 관람객의 시선과 관심을 사로잡을 수 있는 전시 공간으로의 개편이 시급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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