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엘리의 도시는 말한다]⑳말레이시아 클랑항–동남아 교역의 허브, 국가 산업의 관문

현대의 도시는 단순한 생활공간이 아닌 경제 전략의 최전선이다. 세계 각국은 도시 브랜드를 기반으로 투자 유치, 글로벌 인재 확보, 스타트업 생태계 형성 경쟁을 펼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름’은 곧 ‘전략’이며, 도시 간 경쟁력의 상징적 신호로 기능한다. 본 연재는 글로벌 도시의 지명 유래를 통해 경제, 역사, 문화, 외교의 맥락을 통합적으로 조명하고, 독자에게 도시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고자 한다. [편집자주]
월요일 새벽부터 매섭게 퍼붓던 소나기가 마지막 더위와 함께 가을을 불러왔다.
9월1일 개학과 함께 가을이 시작되자 전 세계 곳곳에서 축제를 알리는 소식들이 이어지고 있다. 독일 뮌헨의 옥토버페스트와 아일랜드 갈웨이의 굴·해산물 축제 등이 대표적인 예다.
다가올 11월에는 이탈리아 알바의 백트러플 축제와 일본 사가현의 카라츠 군지 축제, 태국의 롯끄라통 축제까지 기다리고 있다. 이렇게 바다와 항만 도시들은 가을마다 문화와 음식을 무대 삼아 세계인의 발길을 붙잡는다.
한국도 이에 질새라 무창포항 대하·전어 축제, 부산항 축제, 평택항 페스티벌, 목포항구축제가 열린다. 항구와 바다의 낭만을 사랑한다면, 가을이라는 계절은 더없이 좋은 기회가 아닐까 싶다.
아무리 이번 여름처럼 무덥고 습한 여름도 없었다지만, 내 기억 속에는 말레이시아의 수도 쿠알라룸푸르(Kuala Lumpur) 만큼 끈적였던 곳도 없었던 것 같다. 평균 습도가 70~90%에 달해, 제주도의 한여름이 일 년 내내 이어지는 듯 했다.
어린 시절 기억 속 쿠알라룸푸르는 벽면을 벽지마냥 가득 메우고 있던 작은 Gekko라는 도마뱀 무리들과 끈적한 습도 높은 공기와 고무나무, 그리고 정말 달콤하고 맛있었던 별모양의 스타후르츠(Star Fruit)로 가득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십 수년이 흐른 뒤 방문한 오늘날 말레이시아의 관문은 쿠알라룸푸르 한복판도 아니고, 관광지인 페낭섬도 아니다.
▲2023년 기준으로 연간 약 1392만TEU - TEU는 20피트(609.6㎝) 표준 컨테이너 크기를 나타내는 단위로, 20피트 컨테이너 하나가 1TEU다 - 를 처리하며 세계 항만 순위 12위권 안팎에 올라온 곳 ▲아시아 외항만 중에서도 입지가 점차 강화되고 있는 곳 ▲말라카 해협이라는 세계 교역의 목줄을 쥐고 있어 머지않아 글로벌 ‘톱 10 항만’에 들어설 가능성도 거론되고 있는 곳. 서쪽 바다와 맞닿아 있는 클랑항(Port Klang) 이야기다.
이름의 유래 – 진흙 합류지와 강의 항구
쿠알라룸푸르(Kuala Lumpur)는 말레이어다. '쿠알라(Kuala)'는 강이 만나는 합류 지점, '룸푸르(Lumpur)'는 진흙을 뜻한다. '진흙이 많은 강의 합류지'라는 이름은 도시의 태동을 잘 드러내고 있다.
실제로 쿠알라룸푸르는 1857년 주석 광산을 개척하기 위해 클랑강(Klang River)과 곰박강(Gombak River)이 만나는 합류지점에 세워진 작은 정착지에서 시작됐다. 이름이 말해주듯, 두 강이 만든 진흙 벌판 위에서 자원 개발과 교역의 역사가 열린 것이다.
클랑(Klang)의 어원은 조금 더 흥미롭다.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은 클랑강에서 유래했다는 설이다. 여러 설이 있지만 또 다른 설 중 하나는 Mon–Khmer 언어의 'Klong'(수로·운하)과 연결 짓거나, 말레이어 'Kilang'(창고·공장)에서 비롯됐다는 설도 있다.
어느 쪽이든 클랑이라는 이름에는 강·수로·창고, 곧 무역과 산업 활동의 뿌리가 담겨 있다는 점이 주목해볼 만하다.
변화의 기점 – 식민 항구에서 전략적 허브로
클랑항의 시작은 1901년 영국 식민지 시대였다. 당시 영국은 주석과 고무를 안정적으로 수출하기 위해 철도의 종착지에 항구를 세웠고, 그 이름을 당시 행정관의 이름을 따서 포트 스웨튼햄(Port Swettenham)이라 불렀다.
이때부터 클랑은 단순한 항구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자원 수출의 통로이자, 식민 경제를 지탱하는 혈관이 된 것이다.
1972년 독립 후 ‘Port Klang’으로 이름을 바꾸며 항만의 성격도 달라졌다. 단순히 자원을 싣고 내리는 항만이 아니라, 국가 산업 전체를 연결하는 거점으로 전환한 것이다. 여기에 전략적으로 세 가지 선택이 더해졌다.
첫째, 멀티포트 체계다. 클랑항은 ▲Westports ▲Northport ▲Southpoint 등으로 기능을 분산시켰다. 초대형 선박, 환적 화물, 지역 물동량을 나눠 처리하면서 병목을 줄이고 효율성을 극대화했다. 하나의 초대형 항구보다 세 갈래 항만 체계를 통해 리스크를 분산한 것이다.
둘째, 자유무역지대(PKFZ)다. 단순히 물류만 다루는 항구라면 경쟁력이 오래 가지 못한다. 클랑은 항만 배후지에 Port Klang Free Zone을 조성해, 글로벌 제조업·물류 기업을 불러들였다. 물건을 실어 나르는 곳에서, 물건이 만들어지고 가공되는 산업 클러스터로 확장시킨 전략이었다.
셋째, 확장과 브랜딩이다. 전자제품, 팜유, 고무, 목재 등 말레이시아의 대표 수출품이 모두 이 항구를 거치며, 클랑은 자연스럽게 국가 산업의 관문이라는 이미지를 확보했다. 단순히 큰 항만이 아니라, 말레이시아 경제를 대표하는 브랜드 플랫폼으로 자리매김하게 된 것이다.
오늘날의 의미 – 위치를 전략으로, 항만을 브랜드로
오늘날 클랑항은 단순한 항구가 아니다.
연간 1400만TEU 안팎을 처리하며 세계 12위권에 자리하고 있지만, 진짜 의미는 숫자에 있지 않고, 바로 말라카 해협이라는 ‘길목’을 어떻게 전략화 했느냐에 있다.
우선 클랑항은 세계 교역의 4분의 1 이상이 지나가는 해협이라는 천혜의 입지를 놓치지 않았다. 단순히 지리적 이점에 의존하지 않고, 멀티포트 체계와 자유무역지대를 결합해 '머무르고, 가공하고, 다시 흘러가는' 산업 생태계를 만들었다.
두번째로는, PKFZ라는 단일 브랜드를 전면에 내세워, 항만 자체를 국가 산업의 상징으로 키웠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글로벌 물류 회사와 제조 기업이 한데 모이면서, 클랑은 물류 거점을 넘어 아시아–중동–유럽을 잇는 산업 플랫폼으로 자리를 잡았다.
마지막은 바로 이름의 힘이다. ‘쿠알라룸푸르’가 진흙 합류지라는 불리한 지형을 오늘날 금융·상업 도시의 브랜드로 전환했듯, ‘클랑’ 역시 강·창고·수로를 뜻하는 뿌리를 살려 무역의 서사를 브랜드로 각인시켰다는 점이다. 도시의 이름과 항만의 전략이 서로를 강화한 셈이다.
그래서 오늘날 클랑항을 바라보면 단순한 컨테이너 처리장이 아니라, 위치를 전략으로 바꾸고, 항만을 브랜드로 만든 모델이라는 메시지가 보인다.
이처럼 도시는 이름으로 말한다.
클랑항은 “강의 항구”라는 뜻 그대로, 물길을 산업의 동맥으로 바꾸어 냈다. 그리고 항만이 국가 산업의 관문이자 브랜드 자산으로 진화할 수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
다음 물길은 과연 어디로 이어질까?
장엘리 동명대학교 글로벌비즈니스학과 초빙교수 labmoneta618@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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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엘리 교수는 동명대학교 글로벌비즈니스학과 초빙교수이자, 국립외교원/외교부 외래교수, 글로벌 커뮤니케이션 전략 컨설팅사 랩 모네타(Lab MoNETA) 대표 컨설턴트다. 방송 및 언론 분야에서 오랜 경력을 가진 그는 삼표그룹 홍보팀장을 역임했고, 한국경제TV, 내외경제TV, 아리랑TV 등에서 앵커 및 콘텐츠 기획자로 활약했다.
현재는 도시 기반의 경제 커뮤니케이션 전략, 스타트업 국제 진출 컨설팅, 글로벌 IR 피칭 등을 지원하며, 공공기관과 민간기업을 연결하는 실전형 컨설턴트로 활동 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