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우의 투자 레터]⑭화포가 바꾼 세계, AI가 바꿀 미래

1453년, 성벽 앞에 선 두 제국
1453년 봄 콘스탄티노풀의 테오도시우스 성벽 앞은 긴장으로 가득했다. 천년을 지켜온 난공불락의 성벽.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오스만 술탄 메흐메트 2세가 배치한 거대한 대구경 화포들이 성벽을 향해 포문을 열었다.
동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11세도 상황의 심각성을 알고 있었다. 그 역시 화약무기를 확보하려 했다. 1452년, 헝가리 출신 포 제작 기술자 오르반이 거대 화포 제작을 제안했을 때, 황제는 간절히 원했다. 하지만 비잔틴 제국의 국고는 텅 비어 있었다. 기술자에게 줄 보수도, 청동과 화약을 조달할 자금도 없었다.
오르반은 곧 메흐메트 2세에게로 향했다. 술탄은 그에게 충분한 자금과 재료, 그리고 시간을 보장했다. 에디르네에서 석 달에 걸쳐 주조된 거대 화포를 시작으로, 오스만은 다수의 중·대형 포를 배치하고 화약과 포탄의 보급 체계를 완비했다. 53일간의 포격 끝에 5월 29일 무너진 성벽을 통해 오스만군이 밀려들어왔다.
승패를 가른 것은 단순히 화포의 유무가 아니었다. 오스만은 기술자 확보, 주조 능력, 보급 체계를 하나의 시스템으로 완성했다. 비잔틴 역시 화약무기의 필요성과 기술은 알았지만 실현하지 못했다. 그날 이후, 동로마 제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지중해의 무역로와 유럽의 문명 지형이 바뀌었다.
2025년, 또 다른 '화포의 순간'
57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비슷한 순간을 목격하고 있다. 인공지능을 둘러싼 경쟁이다.
인류 역사상 어느 시기보다 많은 자본이 단일 기술 분야에 집중되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 구글, 메타, 아마존, 테슬라는 각각 연간 수백억달러 이상을 AI 인프라에 투자하고 있다. 엔비디아의 최신 AI 칩은 공급 부족으로 프리미엄을 받으며 거래되고, 최고 AI 연구자들의 연봉은 수백만달러를 호가한다.
국가들의 움직임은 더 드라마틱하다. 미국은 2022년 반도체법을 제정해 527억달러 규모의 직접 지원과 세액공제를 약속하며, 글로벌 반도체 기업들에 미국 내 생산을 압박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64억달러, TSMC는 66억달러, 인텔은 85억달러의 보조금을 확보하며 미국 내 투자 규모를 대폭 확대했다.
중국은 2025년 AI와 첨단기술 분야에만 980억달러를 투자하고, 3기 반도체 국가 펀드로 660억달러를 조성하며 반격에 나섰다. 민간 부문에서도 알리바바가 3년간 75억달러, 화웨이가 매년 35만개 이상의 AI 칩을 생산하며 미국의 수출 규제 속에서도 기술 격차를 좁히고 있다.
대만과 한국, 유럽연합 모두 첨단 반도체와 AI 인프라 확보에 국운을 걸고 있다. 심지어 사우디아라비아와 UAE 같은 중동 국가들조차 AI 주권 확보에 수천억달러를 투자하고 있다.
산업 구도를 바꾸는 힘
AI 경쟁이 산업을 재편하고 있다는 증거는 이미 나타나고 있다. 구글은 AI 기반 검색으로 20년간 유지해온 광고 모델을 스스로 파괴하고 있으며, 마이크로소프트의 GitHub Copilot은 소프트웨어 개발 방식 자체를 바꾸고 있다. 챗GPT는 학교와 학습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만들고 있다.
제조업에서는 AI가 제품 설계부터 생산 공정, 품질 관리까지 전 과정을 혁신하고 있다. Physical AI와 로보틱스의 결합으로 창고, 공장, 물류의 자동화가 가속화되고 있다. 신약 개발에서는 AI가 단백질 구조를 예측하고 분자를 설계하며, 수년이 걸리던 과정을 수개월로 단축시키고 있다.
금융권에서는 리스크 관리와 투자 분석에, 법률 분야에서는 계약서 검토와 판례 분석에, 의료 분야에서는 진단과 치료 계획 수립에 AI가 깊숙이 들어왔다. AI의 영향을 받지 않는 산업은 없어지는 추세다.
안보의 새로운 차원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안보적 함의다. 1453년 화포가 전쟁의 양상을 바꿨듯이, AI는 21세기 안보의 핵심이 되고 있다.
자율 무기 시스템, 사이버전, 정보전, 군사 의사결정 등 모든 영역에서 AI의 우위는 곧 군사적 우위를 의미한다.
미국 국방부는 "AI에서의 리더십이 국가 안보의 핵심"이라고 공언했다. 중국은 2030년까지 AI 분야 세계 선두 국가가 되겠다는 목표를 국가 전략으로 천명했다.
더 근본적으로, AI는 전쟁을 '발생 전'에 억지하는 능력을 결정한다. 정찰위성 데이터 분석, 사이버 공격 탐지와 방어, 핵심 인프라 보호처럼 현대전의 모든 것이 AI 역량에 달려 있다. 화포가 성벽을 무력화했듯이, AI는 기존 안보 개념 자체를 재정의하고 있다.
게다가 이것은 무기의 경쟁만이 아닌 규칙을 쓸 권리를 둘러싼 싸움이다. AI 표준을 정하는 국가가, AI 프레임워크를 지배하는 기업이, 데이터와 컴퓨팅 파워를 장악한 주체가 다음 시대의 규칙을 만들 것이다.
왜 자본이 몰리는가
투자자들은 국가들의 움직임, 기업들의 경쟁들을 목격하고 있다. 엔비디아의 시가총액은 2년 만에 4조달러를 돌파했다. AI 반도체, 고대역폭 메모리(HBM), 첨단 패키징 기술, 데이터센터, 전력 인프라 관련 기업들이 시장을 견인하고 있다.
지정학적 긴장 고조와 인플레이션 우려에도 불구하고 최근 상승세가 지속되는 데는 세 가지 구조적 이유가 있다.
첫째, 병목의 가격 결정권이다. 첨단반도체, EUV 노광 장비, HBM, 첨단 패키징, 데이터센터 전력 등 이들은 AI 시대의 필수 병목이다. 1453년 화약과 청동이 그랬듯이, 병목을 장악한 소수가 초과 수익을 가져간다.
둘째, 선순환의 복리효과다. AI 모델은 사용될수록 더 많은 데이터를 학습하고, 더 나은 성능으로 더 많은 사용자를 끌어들인다. 시간이 지날수록 격차가 벌어지고, 뒤처진 기업이나 국가가 따라잡기는 점점 더 어려워진다.
셋째, 표준의 잠금효과다. 한번 생태계가 특정 기술을 중심으로 형성되면 전환 비용이 급증한다. 기술적으로 더 우수한 대안이 나와도 이미 굳어진 표준을 뒤집기는 어렵다.
이 흐름은 언제까지
핵심 인프라의 투자는 최소 수년간 지속될 것으로 예상된다. 첨단 반도체 파운드리의 건설에는 3~5년이 걸리고, 데이터센터 전력 인프라 구축에도 비슷한 시간이 필요하다. 이미 발표된 투자 계획만으로도 2027~2028년까지의 수요는 가시화돼 있다.
경쟁 구도는 더욱 치열해질 것이다. 반도체 공급망의 각 단계인 설계, 제조, 패키징, 장비, 소재에서 미국, 중국, 유럽, 일본, 한국, 대만이 치열한 각축전을 벌이고 있다. AI 분야 역시 대규모 언어모델 개발, AI 칩 설계, 데이터센터 구축, 전력 인프라 확보에 이르기까지 전방위적 경쟁이 펼쳐지고 있다.
그러나 리스크도 분명 존재한다. 전력망 증설 지연이나 지정학적 공급망 충격이 투자 시나리오를 바꿀 수 있다. 무엇보다 인류 역사상 가장 큰 현재의 투자가 기대한 수익으로 전환되지 않는 지점인 환멸의 계곡에 도달하는지 주시해야 한다.
따라서 투자자로서 우리는 이 흐름의 수혜자를 찾으면서도, 국가정책, AI의 보급현황, HBM 공급상황, 데이터센터 전력 계약 진행, 주요 기업들의 모델 출시 주기 같은 선행 지표들을 면밀히 모니터링해야 한다.
역사는 반복된다
1453년 5월 29일 이후 콘스탄티노풀은 이스탄불이 되었다. 동로마의 학자들은 서유럽으로 흩어졌고, 그들이 가져간 고전 텍스트들은 르네상스의 씨앗이 되었다. 향신료 무역로가 막히자 유럽인들은 새로운 항로를 찾아 대항해 시대를 열었다. 하나의 성벽이 무너지면서 세계사의 흐름이 바뀐 것이다.
오스만과 비잔틴의 차이는 무엇이었을까? 둘 다 화포의 중요성을 알았다. 하지만 오스만은 기술자를 확보하고, 주조 시설을 갖추고, 보급 체계를 완성하고, 이 모든 것을 하나의 시스템으로 작동시켰다. 비잔틴은 기술을 알았지만, 시스템을 만들지 못했다.
2025년, 우리는 또 다른 분기점에 서 있다. AI라는 화포 앞에서, 누가 화포기술자 오르반을 확보할 것인가? 누가 주조 시설을 먼저 완성할 것인가? 누가 보급 체계를 장악할 것인가?
기업과 국가, 그리고 투자자들의 선택이 모이는 곳에서 다음 시대의 규칙이 만들어질 것이다. 역사는 반복된다. 다만 이번에는 화포 대신 AI가, 성벽 대신 기존 산업 구조가 무너지고 있다.
이민우 아테나자산관리자문 대표 athena@athenaam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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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우 대표는 대기업 기획부문 출신이다. 18년 간 1300명이 넘는 고객에 대한 지속적 자산관리 서비스를 제공하며 풍부한 현장 경험과 연구 실적을 쌓았다. 글로벌 경제에 대한 인사이트와 투자 포트폴리오를 제공하며, 경제동향 기고를 비롯해 활발한 방송 활동을 하고 있다. MBA, 증권투자상담사, 펀드투자상담, 종합자산관리사, 종합재무설계사, 심리상담사 자격이 있으며, 매일경제TV 월가월부, OBS 돈잇슈, EBS 뉴스, NBN내외경제TV, 부동산경제TV 및 경제관련 유튜브 등에 출연했다.
이 대표의 전문 분야는 매크로 이슈 관련 산업 섹터 포트폴리오 조정과 섹터내 선도 종목 교체를 통한 시장 초과수익 달성이다. 현재 경영 중인 자산관리 자문사의 파트너들과 법률·세무·회계·심리 서비스를 제공하는 등 자산 관리 측면에서 발생하는 리스크 관리 업무를 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