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엘리의 도시는 말한다]⑲선전(深圳) – 얕은 물길에서 세계 혁신 도시로

현대의 도시는 단순한 생활공간이 아닌 경제 전략의 최전선이다. 세계 각국은 도시 브랜드를 기반으로 투자 유치, 글로벌 인재 확보, 스타트업 생태계 형성 경쟁을 펼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름’은 곧 ‘전략’이며, 도시 간 경쟁력의 상징적 신호로 기능한다. 본 연재는 글로벌 도시의 지명 유래를 통해 경제, 역사, 문화, 외교의 맥락을 통합적으로 조명하고, 독자에게 도시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고자 한다. [편집자주]
유난히 무더웠던 2025년 여름이다. 방학이라는 단어가 무색할 만큼 숨 가쁘게 지나온 8월의 끝자락이다. 부산에서는 9월 개학과 함께 부산국제항만컨퍼런스(BIPC 2025)가 어김없이 열리고, 세계적인 석학들이 글로벌 항만 전략과 물류 정책을 논의할 것이다.
항만은 단순히 물류의 거점이 아니라, 도시의 브랜드와 정체성을 형성하는 무대이기도 하다. 그런 맥락에서 이번 글은 세계 4위 컨테이너 항만을 품고 ‘깊은 물길의 도시’로 성장한 선전(深圳)의 이야기를 풀어보고자 한다.
이름의 유래–깊은 물길의 땅
‘선전(深圳)’ 하면 바로 IT, 혹은 혁신이라는 단어를 떠올린다.
오늘날 선전은 고층 빌딩이 숲처럼 늘어서 있고, 글로벌 IT 기업의 로고들이 휘황하게 빛나지만, 불과 50여년 전만 해도 이곳은 습지와 논밭이 뒤섞인 작은 어촌이었다. 선전은 홍콩의 번쩍이는 네온사인이 지척에 있었음에도 그저 '국경 근처의 변방' 정도로 여겨졌다.
하지만 이름 속에 흐르는 물길처럼, 이 땅에는 끊임없는 가능성이 모여들고 있었다. 도시의 이름은 단순한 표식이 아니라, 그 땅의 기억을 담기 때문이다.
선전(深圳)이라는 지명은 두 글자로 이루어졌다. ‘심(深)’은 깊음을 뜻하고, ‘진(圳)’은 농업용 수로나 작은 도랑을 의미한다. 합쳐서 '깊은 수로, 깊은 물길의 땅'이라는 뜻이다. 습지가 많고 강줄기가 갈라져 흐르던 이 땅의 풍경을 이름 속에 고스란히 새겨둔 셈이다.
그러나 이 '깊은 물길'이라는 이름은 단순한 지형 묘사가 아니었다. 작은 물길이 모여 깊이를 더하듯, 선전은 훗날 수많은 자본과 기술, 사람과 기업이 모여들어 세계 경제의 심장으로 뛰게 될 운명을 이미 담고 있었다.
변화의 기점–경제특구와 항만 개발
덩샤오핑의 1979년 개혁·개방 정책은 중국 현대사의 전환점이었다. 바로 이때 선전은 중국 최초의 경제특구(Special Economic Zone, SEZ)로 지정됐다. 국경선 바로 옆 홍콩과 맞닿은 이 작은 어촌을 실험무대로 삼아 외국 자본과 기술을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다.
지리적 특성 또한 선전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 남쪽으로는 홍콩이라는 세계적 항만·금융 허브가 있고, 북쪽으로는 중국 내륙의 광둥(廣東)성 제조업 지대가 연결돼 있었다. 즉, 자본과 기술을 들여올 창구와 노동력과 생산 기반을 활용할 배후지가 동시에 존재했던 것이다. 이는 개혁·개방 실험지로서 선전이 가진 독보적인 장점이었다. 한마디로 선전은 주강 삼각주(Pearl River Delta)의 한 축에 놓여 있었던 것이었다. 홍콩이 국제금융과 무역의 전통 허브라면, 선전은 개방 이후 곧바로 제조업·물류의 관문으로 자리매김했다.
특구 지정 이후 가장 먼저 집중된 것은 항만 개발이었다. 당시 중국은 수출입 물동량을 처리할 현대적 항만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그래서 선전은 항만 인프라에 막대한 투자를 쏟아부었다.
얀톈(Yantian)항은 초대형 컨테이너선을 처리할 수 있는 심수항으로 개발되었고, 치완(Chiwan)·서관(Shekou)·다챠완(Dachan Bay) 등 항만 단지가 잇따라 조성됐다. 이렇게 만들어진 다중 항만 체계(Multi-port System)는 선전이 단일 도시임에도 세계 주요 항만들과 경쟁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항만 개발은 도시의 성장 엔진이 되었으며, 불과 수십 년 만에 선전항은 세계 4위(2024년 기준) 컨테이너 처리량을 자랑하는 초대형 항만으로 부상했다.
항구는 단순히 물류를 처리하는 거점이 아니라, 세계 ICT 공급망의 혈관이 되었다. 화웨이, 텐센트, DJI 같은 기업들이 만든 부품과 완제품이 바로 이 항만을 통해 전 세계로 흘러간다.
1980~1990년대 선전항은 중국 내 가공무역(加工貿易)의 출구였다. 세계에서 들여온 원자재와 부품이 선전과 주강 삼각주 지역에서 조립·가공되어 다시 전 세계로 나갔다. 당시 ‘세계의 공장’으로 불린 중국 제조업의 성장 스토리는 사실상 선전항의 부두에서 시작된 셈이다.
이 과정에서 항만은 단순한 물류 시설이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외국 자본이 들어오는 길목이자 선진 기술이 도입되는 통로였고, 글로벌 무역 질서를 경험하는 첫 관문이었다. 다시 말해 항만은 곧 개혁·개방의 상징이었고, 선전의 정체성을 바꿔 놓은 엔진이었다.
오늘날의 의미–상품의 게이트웨이, 도시 브랜딩의 핵심
오늘날 선전은 흔히 ‘중국의 실리콘밸리’라 불린다. 하지만 도시를 세계적 반열에 올린 것은 빌딩숲과 IT기업의 간판만이 아니다. 선전의 힘은 바로 항구에서 비롯된다. 홍콩이 '자본의 게이트웨이'라면, 선전은 '상품의 게이트웨이'다. 이 이중 구조 덕분에 주강 삼각주는 세계 최대의 제조–물류 클러스터로 성장했다.
도시 브랜딩 관점에서 보자면, 선전은 스스로를 '젊은 도시, 혁신의 도시, 항만 도시'라고 새롭게 정의했다. 불과 반세기 전 어촌이었던 곳이 오늘날 글로벌 무역의 심장부가 된 것이다. 도시의 이름이 가진 ‘깊은 물길’이라는 의미는 이제 글로벌 공급망의 깊이와 연결성을 상징하는 브랜드 자산이 되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대한민국의 부산항을 떠올리게 된다. 부산은 미주·유럽 항로를 잇는 주요 주간선 항로 위에 있으며, 동북아 GDP의 25% 이상을 차지하는 경제 중심지에 위치한다. 지리적 최적지라는 강점을 토대로, 부산 역시 세계 물류 허브로서 도시의 정체성을 만들어왔다.
도시는 이름으로 말한다.
“깊은 물길의 땅” 선전은 항구를 통해 세계의 흐름을 바꿨다. 작은 어촌이던 이곳은 이제 ICT 공급망의 심장이자 글로벌 무역의 관문이다. 도시 브랜딩은 이름과 역사, 그리고 지리적 강점을 어떻게 엮어내는가에 달려 있다.
부산 또한 같은 메시지를 전한다. 항만은 단순한 물류의 거점이 아니라 도시의 미래를 설계하는 브랜드 자산이다. 선전이 깊은 물길에서 출발해 세계 항만 도시로 성장했듯, 부산도 동북아를 넘어 세계와 맞닿는 관문으로서 자신만의 이야기를 써가야 한다.
“깊은 물길은 더 멀리 흐르고, 도시의 항만은 곧 도시의 브랜드다.”
장엘리 동명대학교 글로벌비즈니스학과 초빙교수 labmoneta618@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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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엘리 교수는 동명대학교 글로벌비즈니스학과 초빙교수이자, 국립외교원/외교부 외래교수, 글로벌 커뮤니케이션 전략 컨설팅사 랩 모네타(Lab MoNETA) 대표 컨설턴트다. 방송 및 언론 분야에서 오랜 경력을 가진 그는 삼표그룹 홍보팀장을 역임했고, 한국경제TV, 내외경제TV, 아리랑TV 등에서 앵커 및 콘텐츠 기획자로 활약했다.
현재는 도시 기반의 경제 커뮤니케이션 전략, 스타트업 국제 진출 컨설팅, 글로벌 IR 피칭 등을 지원하며, 공공기관과 민간기업을 연결하는 실전형 컨설턴트로 활동 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