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스크 콕] 유럽이 문을 좁힌다-IAA가 한국 배터리·완성차 기업에 던지는 질문

유럽이 산업 보호주의의 외피를 법제화하기 시작했다. 3월 4일 유럽연합(EU) 집행위가 공개한 산업가속화법(IAA) 초안은 표면적으로 유럽 제조업 육성과 탈탄소 촉진을 내세우지만, 구조를 들여다보면 메시지는 하나로 수렴한다. 중국 자본과 중국산 부품에 의존하는 공급망을 유럽 안으로 끌어들이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불똥은 중국에만 떨어지지 않는다. 한국 기업들은 이 법안의 수혜자가 될 수도, 피해자가 될 수도 있다. 어느 쪽이 될지는 이미 갈리고 있다.
IAA의 핵심 메커니즘은 단순하다. 공공조달과 보조금 등 공공지원을 받으려면 '유럽 내 생산(Made in EU)' 요건을 충족해야 한다. 전기차용 배터리의 경우 법 시행 즉시 셀을 포함한 핵심 구성요소 3개 이상이 EU산이어야 하고, 시행 3년 후에는 셀·양극재·배터리관리시스템(BMS) 등을 포함한 5개 이상으로 조건이 강화된다. 배터리 전체 가치의 몇 퍼센트라는 방식이 아니라 핵심 부품 개수를 세는 구조다.
얼핏 단순해 보이지만 함의는 무겁다. 셀과 양극재를 유럽 현지에서 생산하지 못하면 유럽 시장의 공공지원 생태계에서 배제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외국인 투자 요건도 달라진다. 글로벌 생산능력의 40% 이상을 통제하는 국가 기반 기업이 EU에 1억유로 이상을 투자할 경우, 외국인 지분을 49% 이하로 제한하고 핵심 기술 이전까지 요구한다. 사실상 중국 기업을 겨냥한 조항이지만 구조는 보편적으로 적용된다.
미국의 인플레이션 방지법(IRA)이 현지 생산에 세액공제를 제공하는 '공급 조건부 인센티브'였다면, IAA는 기술을 역내에 심는 것까지 요구하는 '기술이전 조건부 인센티브'다. EU가 단순한 생산 거점 유치가 아니라 산업 주권 자체를 확보하려 한다는 신호다.
배터리 기업 입장에서 이 법안의 구조는 나쁘지 않다. 한국은 EU와 포괄적 FTA를 체결한 파트너로 로컬 콘텐츠 판정에서 일정한 완화 적용 가능성이 있고, 셀 메이커 3사 모두 유럽 현지 생산 거점을 보유하고 있다. LG에너지솔루션은 폴란드, 삼성SDI와 SK온은 헝가리에 각각 공장을 두고 있어 IAA 요건을 충족할 최소한의 기반은 갖췄다. 양극재에서는 에코프로비엠이 유럽 내 유일하게 올해부터 본격 양산에 돌입하는 업체로, IAA 시행 3년 후 강화되는 요건에서 가장 직접적인 수혜를 받을 위치에 있다.
문제는 완성차다. 현대차·기아는 지난해 유럽에서 전기차 18만3912대를 판매하며 역대 최다 기록을 세웠지만, 아이오닉 5·6·9과 EV3·5·9 등 주력 모델 대부분이 한국에서 생산돼 수출되는 구조다. 체코·슬로바키아에 현지 공장이 있지만 일부 모델만 담당한다. IAA가 요구하는 배터리를 제외한 차량 부품 70% EU산 요건이 현실화되면, 한국산 수출 모델은 보조금 수혜 대상에서 밀려날 수 있다. 보조금은 전기차 가격 경쟁력의 핵심 변수다. 보조금을 받지 못하는 모델은 소비자 선택지에서 뒤로 밀린다. 미국 IRA 충격 때처럼, 유럽 현지 생산 확대를 위한 전략 재편 압박이 다시 현실이 되는 셈이다.
결국 IAA는 한국 기업들에게 같은 질문을 두 번 던지는 법안이다. 배터리 기업에게는 셀과 양극재와 BMS를 유럽 현지에서 동시에 공급할 수 있는 구조를 언제까지 완성할 수 있느냐고 묻고, 완성차 기업에게는 수출 중심 전략을 유지할 것인지 현지화를 선택할 것인지를 묻는다. 세부 규정은 아직 확정되지 않았고 유럽 의회와 EU 이사회의 승인 절차가 남아 있다. 그러나 방향은 이미 정해졌다. 유럽이 문을 좁히는 속도보다 현지화의 속도가 빠른 기업만이 이 법안을 위기가 아닌 기회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