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와 평론 / Polit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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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가 무너지면 루미도 사라진다


1e40e09b5aa4e0efd741492b1045de320c8ce746.jpg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루미와 더피. (사진: 넷플릭스) ‘한류’ 라는 이름으로 아시아권에서 차곡차곡 역량을 축적해 온 우리문화가 세계적 주류문화로 진입한 건 문재인정부 때였다. 방탄소년단은 빌보드에서 기록을 갱신해갔고 지금은 월드스타가 된 블랙핑크가 2017년에 데뷔했다. 아이돌 그룹 뿐 아니라 아이유 같은 솔로 아티스트들과 한국의 힙합 뮤지션들, 페기 구 같은 디제이도 유튜브와 무대를 통해 글로벌 팬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결국 2020년에 방탄소년단의 ‘다이너마이트’ 가 빌보드 핫 100 1위를 하고, 영화 ‘기생충’이 아카데미 상을 수상하는 대사건들이 일어났다. 
그 시기는 우리나라가 ‘평화적인 무혈혁명으로 정권을 교체한, 아시아 최고의 민주주의 국가’로 각광을 받던 시기였다. 반정부 시위를 한다치면 일단 타이어 정도는 태우고 시작하는 서구권 리버럴들에게 주말에 가족들이 함께 하는 질서정연한 시위는 많이 이상해 보였을 거다. 어쨌든 그런 시위로 정권을 교체한 한국은 각국 정상들과 다자 외교 무대에서 인기가 있었다. 동아시아 민주주의 1등 국가라는 자부심, 적극적 정치참여의 ‘효능감’과 자신감이 사람들 사이에 충만했던 때였다. 마침 등장한 스타들과 창작자들도 여러 수상을 하며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문화를 키우는 건 참 어려운 일이다. 문화는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 정부’(김대중 전 대통령) 와 자유로운 사회 분위기를 토양으로 성장한다. 그리고 그 나라가 개방적이고 깨끗하다(실제로는 부족할지라도) 는 대외적 인식이 확산될 때 세계로 뻗어갈 힘을 얻는다. 오랜 역사와 다채로운 문화적 자원이 있더라도 정치가 후진 나라의 콘텐츠는 인기가 없다. 아무리 재능있는 개인이나 국가차원의 지원이 뒷받침된다 해도 후진 사회의 촌티를 가릴 수는 없다. 아주 가끔, 폐쇄적인 독재국가 출신의 예술가가 주목을 받고 국제적 수상도 하지만 그런 성취가 지속적인 문화적 흐름이 되지는 못하는 것을 많이 봤다. 
한 때 잘 나갔던 홍콩의 음악이나 영화, 미식이 언제부터 저물었는지, 왜 14억 인구를 가진 강대국 중국의 음악과 가수들은 세계적인 명성을 갖지 못하는지를 생각해 보면 뻔하다. 민주주의가 없는 사회, 폐쇄된 사회의 문화는 보편적 공감을 줄 수 없기 때문이다. 정치가 망가지고, 특히 리더들이 후져지면 문화도 생기를 잃는다. 박근혜 대통령 시절 국정농단 측근들에 의해 기획된 평창올림픽 콘텐츠를 떠올려보자. 경제나 집값처럼 관이 의지를 갖고 부양하거나 컨트롤 할 수 없지만 사회적 퇴행의 악영향은 직격으로 받는 것이 바로 문화다. 문화는 정치와 경제처럼 정부의 직접적인 통제로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개방적이고 건강한 사회 시스템 속에서 자연스럽게 피어나는 유기체와 같다. 
'21세기 민주주의 대한민국'을 토양으로 세계로 튀어오른 케이팝은 이제 '케이'의 것만이 아니게 됐다. 한때 한국어 가사를 노래하는 아이돌에게 대통령이 감사메시지를 보낼 때가 있었지만 지금의 케이팝은 거의 100% 영어 가사를 각국에서 온 가수들이 부르고, 보고, 즐기는 글로벌 문화현상이다. 세계 어느 도시를 가도 케이팝 콘서트가 열리고, 젊은 여성들은 다 '올영'을 알고 한국 화장품을 쓴다. 케이팝 문화는 우리로부터 그들에게 전파된 것을 넘어 그들 안에 스며들어 '재창조'되는 데 이르렀다. 그런 차원에서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엄청난 흥행은 상징적인 사건으로 다가온다. '케데헌'의 흥행은 케이컬쳐의 정점을 느끼게 하지만 한편으론 이 열광이 끝에 다가온 것이 아닐까 싶은, 서늘한 기운을 느끼게 한다. 한국적인 상징을 가득 담았지만 한국에서라면 절대 못 만들어졌을 서사와 캐릭터들은 통쾌한 한편 '우리는 왜' 같은 아쉬움도 준다. 그리고 그것의 성공을 받아들이는 한국 언론과 관가의 구태의연한 반응을 보면 지금은 ‘케이’의 끝이 시작되는 순간인지도 모르겠다. 
2021년에 대통령 일정 수행으로 카자흐스탄에 갔을 때, 한국어학당에 다니는 10대 여성들을 만났다. 그들은 한복을 차려입고, 무려 '부채춤'을 추며 우리를 환영했다. 행사가 끝날 때 쯤, 그들 중 하나가 교사의 눈을 피해 조심스레 나에게 '강남에 가 봤냐'고 물어왔다. 그러면서 자신의 꿈은 '한국어를 공부해 카자흐 주재 한국 대기업에 취업해서 언젠가 '별에서 온 그대' 촬영지인 강남에서 일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녀의 꿈이 이뤄지면 우리는 '강남'에서 만나기로 기약했다. 
우리가 어릴 때 ‘천재소년 두기’나 ‘프렌즈’ 를 보고 뉴욕과 엘에이를 동경했던 것 처럼, 한국은 세계의 사람들에게 꿈과 환상의 대상이 되었다. 그들을 더 크게 매료시켜 케이팝의 성취를 지속할 사람들은 여전히 어딘가에서 창작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급격하게 후져지는 이 사회가 그들을 후져 보이지 않게 지켜줄지는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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