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rang's Colloquy

칼 슈미트 비판

하랑 0 60 08.28 03:17

당신은 법이 왜 존재하는지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평온한 시절에는 그 누구도 이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법은 그저 배경처럼, 공기처럼 당연히 거기 있는 것으로 여겨지니까.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질문이 절박해지는 순간은 늘 정반대의 상황이다. 위기가 닥치고, 질서가 흔들리고, 누군가 지금은 비상한 때라고 선언하는 바로 그 순간.


한 세기 전, 독일의 법학자 칼 슈미트는 이 질문에 답하려 했다. 물론 그는 훗날 나치 정권에 협력한 이력으로 학문적 신뢰를 스스로 무너뜨렸지만, 그럼에도 그의 개념들은 사라지지 않고 지금까지 반복해서 소환된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나치 부역자라는 낙인이 찍힌 사상가의 도구를, 사람들은 왜 굳이 다시 꺼내 들까?


답은 간단하다. 그가 제시한 이론이 다른 어디서도 구하기 힘든 특정한 기능을 하기 때문이다. 물론 권력을 정당화하려는 시도는 많았다. 하지만 대개는 너무 노골적이어서 금방 들통났다. "내가 원해서 힘을 쥐었다"라는 말은 변명조차 되지 못한다. 또한 오래된 절대 군주정의 논리는 이제는 현대 국가에 그대로 옮겨 쓰기엔 너무나도 낡았다. 반면 슈미트가 남긴 것은 달랐다. 그는 단순히 "그럴 수밖에 없었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대신에 그는 법치라는 틀 자체가 원리적으로 특정 순간을 다루지 못한다고, 그 무능력이야말로 진실이라고 주장했다. 한마디로 변명이 아니라 이론을 내놓은 것이다. 그러니 그의 개념들이 매력적으로 보이는 이유는 명확하다. 개별 행위를 정당화하는 게 아니라, 애초에 그 행위를 심판할 자격이 법에 없다고 말해주기 때문이다.


그가 주장한 명제는 이렇다. 주권자란 예외 상태를 결정하는 자다. 또한 평상시엔 법이 작동하지만, 규범이 예상하지 못한 위기가 오면 법은 침묵한다. 그러므로 그 침묵의 순간에 누가 무엇을 근거로 질서를 세울 것인가? 그런데 규범주의는 이 질문에 답을 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진단이었다. 그러니 그 공백을 메우는 건 미리 정해진 규칙이 아니라, 그 순간에 결단하는 자의 의지라는 것이다. 따라서 규범이 아니라 결단이 먼저이며, 법이 상황을 규정하는 게 아니라, 상황을 예외로 규정하는 힘이 곧 주권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법은 왜 만들어지는가? 사실 사람이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완벽히 알 수 있다면 애초에 규칙이 필요 없을 텐데 말이다. 그러니 법이 존재하는 이유는 정확히 그 반대다. 우리가 미래를 알 수 없으므로, 예측 불가능한 상황이 언제든 닥칠 수 있기 때문에, 그런 순간에도 자의적인 힘이 아니라 미리 합의된 규칙이 작동하도록 만들어 둔 것이 바로 법이다. 그런데 그가 말하는 논리는 정확히 이러한 존재 이유를 뒤집는다. 법이 정말 필요한 순간, 즉, 위기와 불확실성이 극에 달한 그 순간에 법을 잠시 접어두자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이것은 비 오는 날 우산이 정말 필요할 때 "우산은 원래 맑은 날에 쓰는 물건"이라며 접어버리는 것과 하등 다르지 않다. 결국 위기가 올 경우엔 법의 효력을 정지시켜야 한다는 발상 자체가, 법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를 거꾸로 이해한 결과에 불과하다.


또한 결단이 규범에 앞선다는 명제 역시 마찬가지로 허술하다. 질서란 무엇으로 만들어지는가? 만일 어느 한 사람, 혹은 소수의 결단으로 사회 전체의 질서가 설계될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건 사회의 복잡성을 지나치게 얕본 것이 아닐까. 실제로 사회의 질서란 셀 수 없이 많은 개인의 분산된 지식과 오랜 시행착오가 쌓여 만들어진다. 언어가 그렇고, 관습이 그렇고, 시장이 그렇다. 누구도 언어를 설계하지 않았지만, 언어는 작동하고, 누구도 시장 전체를 설계하지 않았지만, 시장은 굴러간다. 그런데 이러한 축적된 질서를 한순간의 결단으로 대체할 수 있다는 믿음은 결국 "내 판단이 오랜 세월 쌓인 사회적 지혜보다 우월하다"라는 자만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사실 이러한 자만은 낯설지 않다. 계획경제를 설계하려던 이들도 똑같은 확신을 가졌었으니까. 그러므로 시장의 분산된 정보를 몇몇 계획가의 머릿속으로 대체할 수 있다는 믿음과, 축적된 법 규범을 한 사람의 결단으로 대체할 수 있다는 믿음은 인식론적으로 같은 뿌리에서 나온다.


정치의 본질이 적과 동지를 가르는 데 있다는 주장 역시 문제가 있다. 이 구분에 따르면 정치적 대립이란 협상이나 조정의 대상이 아니라 항시 극단으로 치닫는 적대 관계이며, 그 적을 가려내는 게 정치의 본령이 된다. 그런데 법이 오랜 세월 이뤄낸 성취 중 하나가 바로 이러한 적대 관계를 절차적 규칙을 다투는 경쟁으로 바꿔낸 것이다. 실제로 법 앞에서는 누가 적이고 누가 동지인지 국가가 판정하지 않는다. 모두가 같은 규칙 아래서 각자의 목적을 추구할 뿐. 그러니 정치를 다시 적과 동지의 구별로 되돌리자는 주장은 새로운 통찰이 아니라, 법이 힘겹게 넘어선 원시적 단계로의 퇴행에 불과하며, 인류가 적을 나누고 절멸시키는 논리에서 벗어나 규칙과 절차의 경쟁으로 옮겨온 그 여정을, 다시 거꾸로 되돌리자는 이야기와 전혀 다르지 않다.


마지막으로 주권자라는 정의 자체를 들여다보면 순환논법이 드러난다. 그의 이론에서 주권자란 예외 상태를 결정하는 자라고 정의된다. 그런데 누가 주권자인지 알려면 예외 상태를 선언할 수 있어야 하고, 예외 상태가 무엇인지는 다시 주권자가 결정한다고 정의된다. 결국 이 정의는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는다. 그저 "실제로 힘을 쥔 자가 곧 주권자"라는 동어반복일 뿐이다. 하지만 법이 존재하는 이유는 바로 이 순환을 끊기 위해서다. 게다가 권력의 정당성이란 그 권력이 실제로 뭔가를 결정할 힘을 가졌다는 사실에서 나오지 않는다. 그 권력이 사전에 공지되고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적용되는 규칙의 제약 아래 있는가에서 나온다. 그러므로 이러한 제약을 걷어낸 채 "힘을 가진 자가 스스로 예외를 선언하면 그것이 곧 주권"이라 말하는 순간, 정당성과 실력은 결국 같은 말이 되어버린다. 한마디로 힘이 곧 정의라는 오래된 명제를, 철학적 용어로 정교하게 포장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기에 위기를 명분 삼아 법을 쓰레기통에 던져놓자는 논리는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이 문법은 역사에서 낯설지 않게 반복됐다. 매번 다른 얼굴을 하고 나타나지만, 구조는 똑같다. 먼저 위기를 선언하고, 그 위기가 통상의 규범으로는 감당할 수 없다고 규정하며, 그러니 예외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예외를 선언하는 자가 곧 정당한 권력이 된다. 따라서 만일 우리가 이러한 순서를 단 한 번이라도 허용해 줄 경우, 다음에 등장할 누군가도 똑같이 그런 논리를 쓸 수 있게 된다. 법이 왜 존재하는지 잊은 자에게 위기란 언제나 편리한 명분이 되어준다. 그러나 명분이 아무리 정교할지언정, 그것이 답하지 못하는 질문이 있다. 그 예외를 결정할 자격은 대체 누가, 무엇을 근거로 주었는가? 만일, 이 질문에 답하지 못한다면, 남는 것은 결국 힘을 가진 자가 이겼다는 사실뿐이리라.


그런데 사실 이러한 문법을 처음 만든 건 어느 법학자도, 어느 권력자도 아니었다. 위기 앞에서 누구나 한 번쯤은 되뇌이게 되는 말이니까. 지금은 어쩔 수 없다고, 원칙보다는 결과가 급하다고. 나라면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 거라 확신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어쩌면 이 글을 쓰는 나도, 읽는 당신도, 이미 이 사고를 어딘가에서 하고 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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