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azy Train제도는 원래 느리다. 아니, 느려야만 한다. 그것이 검찰이든 정보기관이든 군의 교육체계든, 한 국가가 수십 년에 걸쳐 쌓아 올린 조직이란 결국 한 세대의 판단만으로 재단되기엔 너무 많은 이해관계와 경험치를 안에 축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상적인 국가라면 문제 있는 제도를 고칠 때조차 속도를 늦춘다. 공청회를 열고, 이해관계자를 부르고, 시행 유예기간을 두고, 대안 조직이 자리 잡을 때까지 기존 조직을 완전히 걷어내지 않는다. 이것은 진보와 보수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 운영의 기본적인 문법이다. 그런데 지금 이 나라는 그 문법 자체를 버렸다. 문재인 정권에서 이재명 정권으로 이어지는 10년 가까운 시간 동안(윤석열 정권을 제외하고), 민주당은 문제가 발생한 대상을 고치는 대신 통째로 들어내는 방식을 반복해 왔다. 그 결과 이 나라의 국정 운영은 마치 운전대를 뽑아버린 채 선로를 이탈해 서울 한복판으로 질주하는 열차처럼 보인다. 누구도 브레이크를 잡을 수 없고, 승객들은 그저 이 폭주가 어디서 멈출지 지켜볼 뿐이다.
이러한 탈선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 곳은 정보·수사 기관이다. 2018년에 문재인 정부는 계엄 문건 작성이라는 중대한 위법행위를 저지른 기무사를 해체했다. 문제의 소재는 명확했다. 계엄령을 검토하고 세월호 유족을 사찰한 특정 라인의 책임자들. 그런데 정부가 택한 방식은 그 라인을 도려내는 것이 아니라 조직 전체를 없애는 것이었다. 그 결과 정치 개입과는 아무 관련이 없던 방첩·보안 전문 영관급 장교 181명이 하루아침에 원대로 복귀했고, 이 가운데 112명, 열에 여섯이 3년 안에 군을 떠났다. 북한의 정보활동을 막던 인력이 통째로 증발한 것이다. 놀라운 것은 이러한 실패가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2026년, 이번엔 이재명 정부가 방첩사를 49년 만에 해체하며 약 3천 명 인력 중 천 명가량을 다시 원대복귀·감축 대상에 올렸으며, 국방위 소속 의원의 지적대로 원복 대상 대부분은 12·3 비상계엄과 무관한 사람들이었다. 잘못한 자를 처벌하는 것과 조직 전체를 제물로 바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인데도, 이 정권은 두 번이나 같은 짓을 저질렀다.
이런 방식은 수사기관을 재편하는 데에도 그대로 적용됐다. 국정원의 대공 수사권은 2020년 국회에서 폐지가 결정되고 2024년 실제로 경찰에 이관됐다. 63년간 쌓인 대북 방첩 노하우를 통째로 넘기면서, 경찰은 부랴부랴 안보 수사국을 만들었지만 정작 이관 첫해 안보 수사 직렬 경무관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조직표만 새로 그렸을 뿐 그 조직을 채울 사람이 없었다. 시간이 흘러 나타난 결과는 숫자로 확인되었다. 이관 이후 지금까지 간첩 기소로 이어진 사례는 전무했으니까. 결국 국가의 방첩 역량이라는,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실재하는 자산이 정치적 명분 하나로 정지된 셈이다. 오해하지 마라. 명분 자체가 완전히 근거가 없다는 뜻이 아니다. 과거 국정원의 대공 수사 과정에 인권침해 소지가 있었다는 지적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가 된 관행을 통제하는 것과, 그 기관이 수십 년 쌓은 기능 자체를 폐기하는 것은 전혀 다른 결정이다. 전자는 개혁이지만, 후자는 무장해제다.
검찰을 둘러싼 최근의 움직임은 이러한 행위의 완성판에 가깝다. 1948년 설립돼 78년을 존속한 검찰청이 2026년 10월을 기해 사라지게 되었다. 이에 따라 수사권은 중대범죄수사청으로, 기소권은 공소청으로 쪼개지는데, 정작 이 재편이 실제로 작동하는 데 필요한 세부 절차, 즉 형사소송법 개정은 뒤로 미뤄둔 채 조직을 폐지하기 위한 입법부터 끝냈다. 국회 법사위 산하 전문위원조차 검토 보고서에서 "국가 수사 역량과 범죄 대응력에 미칠 영향을 충실히 논의할 필요가 있다"라고 적었다. 입법을 뒷받침해야 할 기관 스스로가 숙의의 결여를 문서로 남긴 셈이다. 이 개혁의 궤적을 따라가다 보면 이상한 우연과 마주친다. 검찰 개혁이 정점을 향해 갈 무렵, 법무부 산하 위원회는 조사 대상 사건의 상당수를 현직 대통령 관련 사건으로 채웠고, 그중 여러 건은 대통령의 불소추특권으로 재판이 멈춰 있는 사건들이었다. 제도의 개혁이 특정인의 사법적 부담을 해소하는 경로와 정확히 겹치는 순간, 그 개혁은 더 이상 순수한 제도 논의로 남을 수 없다. 검찰이라는 견제 기관이 사라지는 자리에, 그 견제로부터 가장 자유로워질 한 사람이 서 있다는 사실을 우연으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군 교육체계에 대한 접근 방식 역시 마찬가지다. 물론 12·3 내란의 주동자들이 육사 출신이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이 정부의 대통령은 이 사실로부터 "육사 출신이 쿠데타를 세 번이나 했다"라는 문장으로 곧장 건너뛰어, 육·해·공 3개 사관학교의 통폐합을 신속하고 강력하게 추진하라고 지시했다. 역대 육해공 참모총장 46명이 공동 입장문을 내고 "특정 사관학교 출신 일부의 정치 개입을 전체 문제로 일반화하는 것은 오판"이라고 밝힌 것은, 이 조치가 군사 전문가나 현역 지휘관, 예비역 장성의 의견 수렴 없이 일방적으로 결정됐다는 사실을 방증한다. 특정 인물들의 범죄를 그들이 거쳐 간 교육기관 전체의 존재 이유로 확장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다. 이 주장을 끝까지 밀어붙이면 범죄자가 나온 모든 조직은 해체 대상이 되어야 하고, 그 기준으로 살아남을 국가기관이란 단 1개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모든 사례의 공통점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문제의 소재와 해법의 범위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 특정 개인 혹은 특정 라인의 일탈에 대한 응답으로 조직 전체를 소멸시켜 버린다. 다른 하나는 이 비대칭적 해법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합리적 이견이 아니라 불순한 동기로 치환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사관학교 통합에 반대한 참모총장들은 "정치적 보복"이라는 프레임 속에서 다뤄졌고, 선거철마다 여당 인사들은 "내란 세력이 다시 활개 치지 못하게 해달라"라는 구호를 외쳐댄다. 결국 특정 정책에 대한 반대가 통째로 내란 동조로 치부되는 순간, 그 사회에는 더 이상 정책 논쟁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 없게 된다. 남는 것은 우리 편과 상대편의 대치뿐.
이것이 왜 위험한지를 이해하려면 제도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부터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검찰이든 정보기관이든 군의 위계질서든, 이 모든 기구는 국가 권력과 개인 사이에 놓인 완충지대다. 그런데 그 완충지대가 사라지면 남는 것은 결국 거대한 국가와 벌거벗은 개인의 직접 대면뿐이다. 중간 지대의 소멸은 곧 자유의 확장이 아니라 자유가 기댈 곳의 소멸이다. 이런 소멸이 설계도 없이, 오직 응징의 논리로 진행될 때 사회는 특정한 방식으로 무너지기 마련이다. 쉽게 말해 설계자가 아무리 선한 의도를 가졌다 해도, 그가 가진 지식은 그 제도가 오랜 시간 축적해 온 실행적 지혜, 즉 수많은 실무자의 경험과 판단이 누적된 총합에 비할 바가 못 된다. 제도를 향한 이성적 설계가 그 제도의 축적된 지혜를 완전히 대체할 수 있다는 믿음, 그것이야말로 이 모든 폭주의 뿌리에 있는 근본적인 오만이다.
정치의 본질이란 서로 다른 이해와 신념을 가진 사람들이 폭력이 아닌 말로 타협점을 찾아가는 과정에 있다. 그런데 지금 이 나라의 통치 방식은 그 과정 자체를 생략하는 쪽을 택했다. 문제가 생기면 대화하고 조정하는 대신 대상을 통째로 지워버리고, 그 지움에 이의를 제기하는 자는 즉시 적으로 분류해 버린다. 이것은 군대의 작전 방식이지 민주주의의 통치 방식이 아니다. 명령이 내려지면 부대가 움직이고 이의는 항명이 되는 세계. 그것이 지난 약 10년간 이 나라의 검찰에서, 정보기관에서, 군 교육체계에서 반복적으로 목격된 풍경이었다. 기관사가 사라진 열차는 관성으로 계속 달리게 되어 있고, 속도가 오히려 더 붙게 되어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 열차가 언젠가 멈춘다는 사실이 아니라, 멈추는 방식이 승객의 선택이 아니라 충돌이 될 것이라는 점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이 열차에 다시 손을 얹을 사람이지, 다음 선로로 마구잡이로 틀어버리는 것을 정당화할 새로운 명분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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