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파일] 우크라이나가 우크라이나를 침략하는 비극의 시나리오

안상우 기자 입력 2022. 9. 22. 10:54 수정 2022. 9. 22.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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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개월째 이뤄지는 전쟁..반격은 시작됐지만 전쟁은 더 비극적으로 변해간다"

또 발견된 집단 매장지

우크라이나 동북부에 위치한 하르키우주는 러시아와 접경하고 있는 데다, 러시아의 벨고로드와 가장 가까운 우크라이나 지역입니다. 벨고로드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기 직전 러시아군과 장비가 집중된 지역 중 하나입니다. 지난 2월 24일,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 전역을 침공해 들어갈 때 벨고로드에 있던 러시아군은 하르키우주를 침공해 들어왔습니다.
▲ 2월 말 북동부 전선 전황, 뉴욕타임스
 
하르키우주에는 우크라이나의 제2도시 하르키우도 있지만, 전략적 요충지로 꼽히는 이지움도 있습니다. 이지움은 루한스크주와 도네츠크주에 인접하고 있어 향후 러시아군이 돈바스 지역에서 군사 작전을 진행함에 있어서 큰 도움이 되는 곳입니다. 때문에, 러시아군은 침공 초기부터 이지움을 점령해왔는데, 최근 반격에 성공한 우크라이나군이 6개월 만에 되찾아 왔습니다.
 
▲ 9월 초 북동부 전선 전황, 뉴욕타임스
 
문제는 러시아군이 허겁지겁 철수한 뒤 이지움 인근 숲에선 집단 매장지가 발견됐다는 점입니다. 집단 매장지는 여러 곳이나 있었는데, 그 가운데 한 곳에는 많게는 400구가 넘는 시신이 매장돼 있기도 했습니다.
 
 

부차 학살과 판박이

러시아군이 떠난 지역에서 수백 구의 시신이 발견된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침공 초기 수도 키이우를 점령하기 위해 러시아군이 교두보로 삼았던 이르핀과 부차에서 이미 수백 구의 시신이 발견된 바 있습니다.

당시 발견된 시신은 대부분이 민간인이었고, 시신들에는 고문의 흔적이 있었습니다. 지난 6월 저는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에서 2주간 현장 취재를 하면서 민간인 시신을 직접 수습한 자원봉사자도 만났고, 가해자인 러시아군을 찾아 처벌하기 위해 조사 중인 우크라이나 검찰도 만났습니다. 이들은 모두 당시 상황을 설명하면서 "mock"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괴롭히다'는 의미의 단어인데, 러시아군이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살인을 저지른 게 아니라 우크라이나 민간인에게 의도적으로 고통을 주고 영혼을 파괴하기 위해 학살을 저질렀다는 걸 단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표현이었습니다.

당시 상황을 지금 다시 이야기 하는 이유는 이지움에서 발견된 시신들 중에는 부차에서처럼 민간인이 포함돼 있고 고문의 흔적 역시 발견됐기 때문입니다. 아직 모든 시신들에 대한 조사가 완료된 건 아니지만, 민간인으로 확인된 시신들은 팔이 뒤로 묶여있거나 목에 줄이 감겨져 있었고 팔과 다리가 부러진 채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명백한 고문 흔적들인데, 이지움에서는 러시아군이 고문실로 사용했던 시설들도 발견되고 있습니다.
 
"시신 발굴과 함께 포렌식 전문가들이 함께 검시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몇 가지 확인된 사실들이 있습니다. 어떤 희생자의 경우에는 팔이 묶여 있거나 목에 줄이 감겨져 있는 채로 발견됐습니다. 어떤 이들은 팔다리가 부러져 있었습니다. 이런 사실들은 이곳에 묻힌 이들이 고문을 비롯한 매우 폭력적인 방식으로 희생됐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볼로디미르 리마르 하르키우주 검찰청 차장 검사(9월 17일, 하르키우주 이지움)
 

더 큰 비극의 시나리오

지난 18일, 우크라이나 검찰총장인 안드리 코스틴은 미국 CBS 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지금까지 우크라이나 검찰이 조사 중인 러시아군의 전쟁 범죄는 3만 4천 건에 이른다고 밝혔습니다. 이 안에는 우크라이나 민간인에 대한 러시아군의 성폭력, 어린이나 노약자가 대피해 있는 시설에 대한 계획된 공습, 민간인에 대한 고문 행위 등이 포함돼 있습니다.
이미 너무 큰 비극입니다. 하지만, 더 큰 비극이 우크라이나에 찾아올 수도 있습니다. 우크라이나군의 거센 반격이 시작되자 러시아군의 점령지 곳곳에서는 주민 투표를 서두르는 움직임이 포착됐습니다. 이런 움직임과 관련해 러시아가 합병 지역에서 군대를 동원해 우크라이나 전쟁에 투입시킬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옵니다.
 
"우리가 경고해온 것처럼 러시아는 자신들의 점령지는 물론 자신들이 통제하지 못하고 있는 지역에서도 가짜 국민투표를 진행하려 하고 있습니다. 우크라이나군에 밀리고 있는 러시아는 (합병 지역에서의) 동원령 발령을 준비하기 위해 주민 투표를 서두르고 있습니다."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9월 20일, 워싱턴 DC)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계획대로 진행될 경우, 우리는 또 다른 지역에서 집단 학살의 흔적을 발견하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엔 그 가해자들이 러시아군이 아니라 '가짜 국민투표'에 의해 합병된 우크라이나 영토에서 징집된 우크라이나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우크라이나가 우크라이나를 침략하는 더 큰 비극의 시나리오인 것입니다.

지난 2월 24일 침공이 시작된 이후 꼬박 7개월이란 시간이 흘렀습니다. 포기를 모르는 우크라이나의 항전 의지와 서방의 전폭적인 지원에 힘입어 반격이 시작됐습니다만,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끝나지 않은 전쟁은 더 큰 비극을 향해 움직이고 있습니다.

안상우 기자asw@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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