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토 뉴스

한국정치 ‘삭발의 추억’···원하는 바는 얻으셨습니까

2019.09.17 17:58 입력 2019.09.18 09:56 수정 노정연 기자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가 지난 16일 조국 법무부 장관 파면과 문재인 대통령의 사과를 요구하며 삭발을 단행했습니다.

앞서 이언주 무소속 의원과 박인숙 자유한국당 의원이 삭발했고, 황교안 대표에 이어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까지 ‘삭발 릴레이’에 참여했습니다.

삭발은 주로 노동계에서 강력한 투쟁을 독려하고 내부 결속을 다지기 위해 단행되었던 투쟁 방식이었습니다.

이후 정치권에서도 특정 정치 사안에 대한 저항의 표현으로 삭발을 단행하며 대중의 시선을 끌었습니다.

꽤 얼굴이 알려진 정치인이 비통한 표정으로 삭발을 하는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강렬한 시각적 효과를 주는 이점이 있습니다. 때문에 정치권에서의 삭발은 여론을 환기하고 지지층을 결집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용되기도 합니다.

추석 연휴가 끝나자마자 제 1야당의 대표가 삭발에 나선 것 또한 이슈가 가라앉을 것을 우려해 다시금 여론을 환기하려는 목적으로 해석됩니다.

자유한국당 황교안 대표가 16일 오후 청와대 앞 분수대 광장에서 ‘조국 법무부 장관 파면 촉구’를 요구하며 삭발식을 하고 있다./ 이준헌 기자

무소속 이언주 의원이 10일 오전 국회 본청 앞 계단에서 조국 법무부 장관 임명 철회와 대국민 사과를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마친 뒤 삭발하고 있다. 연합뉴스

17일 오전 서울 청와대 앞 분수대 광장에서 자유한국당 박대출 의원이 조국 법무부 장관 임명을 반대하며 삭발식에 동참한 김문수 전 경기지사의 머리를 깎아주고 있다. 연합뉴스

한국 정치권의 첫 삭발은 32년 전으로 거슬러 갑니다.

1987년 박찬종 당시 신민당 의원이 김영삼·김대중 양김의 후보 단일화를 요구하며 삭발 투쟁에 나선 것을 첫 사례로 꼽습니다. 단일화에는 실패했지만 이후 박 의원은 이듬해인 1988년 무소속으로 서울에 출마해 당선됐습니다.

1997년에는 노동법 날치기 통과에 항의한 김성곤 당시 국민회의 의원이, 1998년에는 선거법 위반으로 검찰 수사를 받았던 새정치국민회의 소속 정호선 의원이 억울함을 호소하며 삭발을 나섰습니다. 2004년에는 당시 열린우리당 설훈 의원이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탄핵철회 및 지도부 사퇴를 주장하며 삭발 단식 투쟁을 벌였습니다. 설 의원은 탄핵 철회와 지도부 퇴진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탈당하기도 했습니다.

군부정권 종식을 위한 후보단일화를 촉구하며 삭발에 나선 박찬종 신민당 의원. 1987년 경향신문 자료사진.

정호선 의원이 검찰수사에 대한 항의표시로 국회의원회관에서 공개삭발을 했다. 1998년 경향신문 자료사진.

민주당 설훈의원이 의원회관에서 노대통령 탄핵철회 및 지도부 사퇴를 주장하며 삭발하고 있다./김문석 기자

2000년대 중반 이후에는 정치권의 집단 삭발이 유행처럼 번졌습니다.

2007년에는 신상진·이군현·김충환 의원 등 한나라당 원내부대표 3인이 사학법 재개정을 요구하며 머리를 밀었고, 2010년에는 자유선진당 류근찬 의원을 비롯한 5명의 의원이 이명박 정부의 세종시 수정 방침에 반발해 삭발을 했습니다. 최근에는 지난 5월 한국당 김태흠·성일종·이장우·윤영석 의원과 이창수 충남도당위원장 등 5명이 국회에서 선거제 개편안과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검경수사권 조정안 등의 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건 지정) 처리 원천무효를 주장하며 집단 삭발을 했습니다.

자유한국당 김태흠 의원을 비롯한 4명의 의원과 지역 위원장이 지난 5월 국회 본청 앞에서 선거법 개정안과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법안 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건) 지정의 부당성을 알리는 삭발식을 마친 뒤 구호를 외치고 있다. (왼쪽부터) 이창수 충남도당 위원장, 성일종, 김태흠, 이장우, 윤영석 ,박대출 의원 /권호욱 선임기자

본래 삭발은 종교적인 의미에서 ‘버림, 비움, 죽음’ 등을 상징합니다. 속세를 등지고 인간으로서 모든 욕망을 버리고 다시 태어나겠다는 의미입니다.

종교적 의미를 찾지 않더라도 대한민국에서 삭발은 매우 큰 의미였습니다. 부모에게 물려받은 머리카락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 효의 시작이라는 유교적 가치관이 뿌리깊었기 때문입니다. 1895년 고종 때 단발령이 공포되자 목숨을 던져 항거한 이들도 있었습니다. 현재까지도 머리카락을 자르는 일은 자신의 결연함을 외부에 알리는 효과적인 방법으로 여겨집니다.

하지만 최근에는 정치인의 삭발이 비웃음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너무 흔해졌기 때문입니다.

이번 보수 야당의원들의 ‘삭발 릴레이’를 두고 진보진영을 포함한 여권과 여론의 냉소도 만만치 않습니다.

민주당은 ‘정치적 무능력을 면피하려는 정치쇼’라고 비난했고, 정의당은 “자신의 신체를 담보로 하는 투쟁은 가진 것 하나 없는 약자들이 최후에 택하는 방법”이라며 “구성원 모두 기득권인 한국당이 삭발 투쟁이랍시고 약자 코스프레를 하니 가소롭기 짝이 없다”는 논평을 내놨습니다. 박지원 대안정치연대 의원은 “국회의원이 하지 말아야 할 3대 쇼는 단식, 의원직 사퇴와 함께 삭발”이라며 “머리는 자라고, 굶어죽은 의원 없고 의원직 내던진 사람 없다”고 일갈하기도 했습니다.

삭발은 누구에게나 쉽지 않은 결정이지만, 잘려나간 머리카락이 갖는 절실함의 무게는 보는이들에 따라 다를 것입니다.

보수 야당의 ‘삭발 릴레이’가 ‘투쟁의 결기’로 전해질지, 메아리없는 ‘정치쇼’에 그칠지, 판단은 여론의 몫입니다.

전국학교비정규직노조가 지난 6월 청와대 사랑채 앞에서 개최한 ‘학교비정규직 여성노동자 100인 집단삭발식 및 대통령 공약이행 촉구 기자회견’에서 삭발을 한 여성노동자를 동료가 껴안으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이준헌기자
원문기사 보기
상단으로 이동 경향신문 홈으로 이동

경향신문 뉴스 앱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