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로 자처했고 따라서 압록강 이북의 만주 지역에 끊임없이 관심을 기울였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고려는 정복왕조보다는 중원왕조에 더 우호적인 입장이었으나, 실제로는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고 균형감각을 유지함으로써 격변의 시기에도 국체를 지켰다. 고려는 고구려 못지않게 외부 문화에 개방적이고 포용적이었다. 고려가 우수한 외국 문화를 수입하기 위해 재능 있는 사람이라면 거란족, 여진족, 발해인, 송나라 사람을 가리지 않고 누구에게나 귀화의 문호를 열어 놓고 받아들이려고 노력한 것도 개방성과 포용성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9쪽) 《한국통사》 《한국독립운동지혈사》 등을 쓴 박은식 선생을 비롯하여, 몇몇 민족주의 사학자들이 여진족이 세운 금(金)나라 역사를 한국사에 포함시키려 한 적이 있다. 이러한 시도가 있었던 것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금을 세운 여진족의 역사가 한국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중국의 예를 보자. 중국에서는 만주에 거주했던 많은 종족의 역사를 비롯하여 중국 주변 민족의 역사를 현재 자국사에 흡수했다. 심지어 고구려와 발해까지도 자국사에 포함시키고 있다. 그런데 한국사에서는 우리 민족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금의 역사에 대해 너무 무관심한 경향이 있다. 금의 시조의 출자(혈연상의 뿌리)에서부터 11세기 고려의 대외관계에 이르기까지 금의 역사에 대해 깊이 숙고해야 할 이유는 얼마든지 있다.(137쪽) 몽골족의 흥기는 한국사에도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큰 영향을 미쳤다. 몽골이 흥기하여 대외 원정을 벌이고 있던 시기에 고려에서는 농민 반란이 계속되고 있었다. 내우외환 속에서도 집요하게 저항한 고려는 다른 국가들과는 달리 몽골 세계제국 내에서 국체를 유지할 수 있었고 이전보다 폭넓게 외부 문물을 받아들였다.(252쪽) 몽골군이 다시 대형 포차(砲車, 대포를 실은 공성용 수레) 15대를 동원, 성의 남쪽을 치고 들어와 상황이 위급해졌다. 박서는 성 위에 축대를 쌓게 하고 포차로 돌을 쏘아 적의 공세를 물리쳤다. 몽골군은 기름을 묻힌 섶으로 화공을 했는데 박서는 성루에 준비한 물과 진흙으로 불을 껐다. 이때 김경손이 전투를 독려하다가 적이 쏜 대포알이 머리를 스치고 뒤에 있던 군사에 맞아 온 몸이 박살이 났다. 좌우에서 자리를 옮기라고 권유했으나 김경손은 “내가 움직이면 군사들의 마음이 흔들린다”고 말하며 자리를 옮기지 않았다. 몽골군은 귀주성을 포위하여 온갖 계교와 방법을 동원하여 30일을 공격했으나 실패했다. 몽골군은 “하늘이 돕는 것이지 사람 힘이 아니다” 라는 탄사를 발하고 물러갔다. (294쪽) 고려는 국내와 자국의 세력이 미치는 범위 안에서는 천자?황제를 자칭했으나 외부의 송과 거란에 대해서는 왕을 칭했다. 이러한 면에서 외왕내제(外王內帝)라 할 수 있으나 주변의 강대국인 거란과 송이 고려의 내부적인 칭제를 알고도 문제 삼지 못하고 부분적으로는 인정했다는 점에서 베트남의 경우와는 차이가 난다. 고려의 군주를 천자로 설정한 팔관회(八關會)에 많은 수의 송나라 사신이나 여진족이 참석하여 고려의 칭제가 널리 알려졌다. 고려 스스로가 황제국으로서 자신의 위상을 설정한 것이 주변 여러 나라와 교류하거나 대외정책을 결정하는데 많은 영향을 미쳤다. (65쪽)